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2부 _11
어머니가 거기 있잖슴까
한편 세화는, 내가 베이징에 오기 두 달 전인 6월 말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언니와 함께 베이징으로 왔다.
다도를 배워 찻잎과 다구를 파는 가게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다. 10월 마지막 토요일, 세화를 만나기 위해 찻잎가게가 즐비한 마롄따오(馬連道)로 갔다.
벽면 전체가 다호와 찻잔으로 장식된 가게의 테이블 앞에 세화가 앉아있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상한’ 차림을 한 손님에게 차를 따르고 있던 세화는 그 옆 빈자리를 가리키며 나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옆에 앉은 손님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합장하며 “안녕하세요?”라고 말하였다.
한국어와 낯선 옷차림. 중국에서 ‘법사’나 ‘사부’라고 부르는 승려가 틀림없었다.
나는 승려가 등장하는 한국 드라마를 본 적도, 어머니에게 들은 적도 없어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화상님.”
중국어 단어로 승려를 뜻하는 ‘허샹(和尙)’을 조선족의 핏줄답게 조선 한자음으로 바꾼 후 존칭인 ‘님’을 붙여서 말한 것이다.
그런데 내 인사를 듣자마자 옆자리 손님이 박장대소하였다.
“으하하. 화상님이란다, 화상님. 세화 보살님이 내한테 ‘중님’이라고 부른 게 최고일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한 말이 여 있었네. 으하하하.”
‘화상’은 승려를 뜻하는 말은 맞지만 한국에선 주로 ‘에이구, 이 화상아.’같은 말로 한심한 사람에게 화를 낼 때 쓴다고 했다.
나는 목이 타들어가 세화가 따라 준 따끈한 녹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면 도사님이라고 하면 됨까?”
내 물음에 다시 한번 가게에 ‘으하하하’ 소리가 퍼졌다.
옆자리 손님은 명함을 꺼내 내게 주면서, ‘스님’이라고 부르면 된다고 말했다.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들어본 경상도 억양이었다.
명함에는 ‘지원 스님 · 연화사 주지’라고 적혀있었다. ‘연화사’는 사찰 이름이고 ‘주지’는 관리자라는 뜻이라고 스님이 말했다. 나는 어머니 이름이 ‘송련화’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다만 이렇게 물었다.
“연화사의 연화는 련꽃임까?”
스님은 그렇다고 대답한 후, 불교와 연꽃에 관한 몇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진흙 속에 피는 천 개의 잎을 가진 연꽃과 말없이 통하는 미소 얘기도.
연꽃에 관한 산문은 많이 읽어봤지만,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마치 어머니에 대한 말처럼 들려 심장이 쿵쾅거렸다.
스님은 만날 사람이 있어 베이징에 왔으며, 한 대학에서 5개월째 어학연수를 했고, 한 달 후 귀국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찻잎을 사러 마롄따오에 종종 들르면서 세화가 일하는 가게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곤 귀국 전에 베이징 외곽의 사찰들을 둘러보려 하는데, 중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 ‘유능한 비서’가 필요하다면서 앞으로 두세 번 토요일에 시간을 낼 수 있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낯선 한국인’이라는 어색함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첫 번째 토요일엔 무단웬의 공원 입구에서 스님을 만났다.
근처에 대기하던 택시를 골라 하루치 택시비를 흥정한 후, 베이징 서쪽 외곽 산자락에 있는 졔타이쓰(戒台寺; 계태사)와 탄저쓰(潭柘寺; 담자사)를 차례로 갔다.
웅장한 사찰의 곳곳에선 팔뚝만큼 긴 향이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고 곡선의 지붕과 계단 옆으로 은행나무가 노랗게 빛났다.
특히 탄저쓰는 지붕보다 높은 은행나무가 황금색 잎을 하늘 가득 드리우고 있는 것이며, 법당 앞에 걸려있는 1.5 미터 남짓의 흑색 물고기 모형이 인상적이었다.
“스님, 사람들이 향을 피우고 무릎 꿇고 앉아서 이렇게 비는 의미가 무엇임까?”
“마음의 힘을 모으는 거지.”
“그러문 소원이 이루어짐까?”
“소원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고 나서 더 이상 할 게 없을 때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게 ‘기도’다.
꼭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할 때가, 사실 더 많다.”
어머니는 종교를 전혀 접하지 못했고, 디에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농촌 사람들이 복을 빌기 위해 지전(紙錢)을 태우고 춘련(春聯)을 붙이는 이상은 아니었다.
스님과 깊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불현듯 내 인생에 새로운 언어가 하나 더 보태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향을 한 자루 꺼내어 불을 붙여 법당 입구 화로에 꽂아놓고 안으로 들어가, 무릎 꿇고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았다.
모은 두 손안에 누가 들어있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내가 한 일은 중국 스님과의 대화 통역, 사진 촬영, 눈치껏 물과 간식 챙겨드리기, 향 사오기, 기념품 가게 안내 등이다.
스님이 수고했다며 준 빨간 봉투에는 300위안이 들어있었다.
“말이 아니 됨다. 덕분에 좋은 말씀도 듣고 구경도 잘했는데 이렇게 많이는 못 받갔슴다.”
나는 너무 놀라 100위안만 꺼내 들고 빨간 봉투를 돌려줬지만 스님은 받지 않았다.
“다음번엔 시내에 있는 가까운 절에 갈끼니까, 돈 이래 안 준다. 줄 때 받아라.”
두 번째 토요일엔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용허궁(雍和宮; 옹화궁)과 광화쓰(廣化寺; 광화사)를 차례로 갔고, 내가 한 일은 지난주와 같았다.
광화쓰에서 나왔을 때 마침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바로 근처에 있는 호수공원인 호하이(后海)로 갔다.
사찰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반짝이는 화려한 불빛들은 호수를 파고들어 물속에서도 색색깔로 빛났고, 레스토랑마다 켜놓은 커다란 음악 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스님은 잠시 걷다가 “와, 내 이거 묵고 싶었는데.”라고 말하며 한 가게의 입구로 들어갔다.
피자집이었다. 스님은 치즈피자와 콜라를 주문했다.
“스님. 저는 피자를 처음 먹슴다.”
“어데, 시골 살았나?”
나는 산둥성 린화의 싼웬 집과 사과농장 이야기를 했다.
찻잎가게에서 일하는 중학교 때 친구 세화의 이야기도 했고, 어렸을 때 어머니와 야시장에서 베개포를 만들어 팔았던 이야기도 했다.
왜 이런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멈추지 못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스님은 이따금씩 껄껄 웃으며 온화한 얼굴로 다 듣고 나서 내게 물었다.
“그래, 학교 졸업하면 이제 뭐 할끼고?”
나는 사범대에서 언어를 전공하고 있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소학교나 중학교의 ‘어문’ 과목 선생님이 된다고 대답했다.
“그기 니가 되고 싶은 기가?”
스님의 질문에 순간 생각이 멈췄다.
아니, 시간이 멈췄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이냐고? 아마 그럴 거다.
다른 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싼웬으로 돌아가 선생님이 되는 것,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결정되었다.
“어머니가 거기 있잖슴까.”
내 입에서 나온 대답에 스님은 미묘한 표정이 되며 뭐라고 말을 할 듯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