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2부 _16

네가 그냥 이대로면 어떨까?

by 유연 은정원


다음 날 오전, 디에와 웨이가 각각 농장과 학교에 가 있을 때 고모가 왔다.

베이징에 돌아가지도 농장에 나가지도 않으며 시내를 들락날락하는 나를 지켜봐 온 고모가 마당으로 나를 불러냈다.

늘 디에가 앉는 테이블 자리에 앉아서 내가 나오니 다짜고짜 말을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해 보이는데 네 엄마가 왜 병원에 안 가는지 모르겠다.

‘너희 세 사람’이 대체 뭘 쉬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그동안 ‘우리들’이 ‘너희 둘’에게 최선을 다해 잘해준 건 잘 알 거다.

네 엄마가 죽은 후엔 넌 어떡할 거니?

진짜 샤오옌도 아니면서 ‘우리들’한테 들러붙어 계속 이렇게 지내길 원하니?”


나는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아 고모의 얼굴 대신 마당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는 내 말엔 영영 대답을 하지 않기로 했니?”


틈 없이 몰아세우는 습관은 여전했다.

마음속으로 고모를 버린 건,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죽은(死了)’이라는 발음을 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작정하면 나도 고모의 마음을 짓밟을 말 정도는 청산유수처럼 내뱉을 수 있었지만, 작정하지 않았다.

호시탐탐 노려보며 나를 터트려버리려는 불씨에게 불이 지나가는 길, 도화선을 터주기는 싫으니까.


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지금 디에와 논의 중이다, 내 향후 계획에 대해. 그러니 당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의 중국어를 린화 억양으로 말했다.

고모는 내 대답을 들은 후에도 많은 말을 그야말로 지껄여댔지만, 그때 나에겐 정성 들여 기분 나빠할 힘도 없었기에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밤마다 웨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때론 ‘훗날의 웨이’에게 기억되길 바라며 아직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하기도 했다.

통통하고 말랑말랑한 볼과 명랑한 목소리, 순진무구한 눈동자와 철없는 생떼, 맥락 없는 대화며 뭐든 금방 잊고 작은 것에 헤헤거리는 입가의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아이의 모든 것은 진정 ‘어린이의 것’이었다.


“누나. 나 태어난 날 중국이 브라질에 축구 4대 0으로 졌다고, 디에가 그랬어.”


웨이는 ‘누나’라는 말은 꼭 한국어로 한다.


“응. 맞아. 한국에서 월드컵 경기를 열었을 때야.”

“누나. 한국 가봤어?”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웨이는 “가고 싶어?”라고 물었다, 마치 “다음 주에 베이징 갈 거야?”라고 묻는 듯이.


“가고 싶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만약 누나가 한국에 가면, 너 놀러 올래? 그때 베이징에 온 것처럼 말이야.”


“말해 뭐해? 당연히 그럴게.”


“그래, 좋아. 너의 생일날 축구 경기를 했던 제주도 서귀포라는 곳에도 꼭 가자.”


웨이는 ‘아주 좋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린 가 본 적 없는 곳을 함께 그리워했다.


“그런데 누나! 사실은 나도 축구를 하고 싶기도 하고 안 하고 싶기도 해. 금방 이랬다가 금방 저렇게 바뀌어.”


“그럼 하고 싶을 땐 하고 하기 싫을 땐 하지 마.”


“헤헤. 그럴게. 디에가 싼웬의 유명한 츄미잖아.

근데 다리를 다쳐서 축구를 못 하니까 내가 대신 축구를 열심히 해서 디에를 기쁘게 해주는 거야.

누나, 넌 알지?”


“알지. 디에를 기쁘게 하는 것 빼고, 웨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뭐야?”


“그것은 당연히 노래지. 나는 가사가 아름다운 노래를 제일 좋아해.”


“그럼 하나 불러 줄래? 제일 좋아하는 것들 중에 제일 좋아하는 바로 그걸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웨이는 어렸을 적 어머니가 불러 주던 반월가를 낮게 읊조렸다.

나는 이 곱고 고운 아이를 울려버릴 내 선택에 몸서리를 치면서,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




기차표에 적힌 날짜가 5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디에와 나는 마당의 테이블 앞에 다시 마주 앉았다.

며칠 사이 몇 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디에가 말했다.


“샤오옌. 네가 그냥 이대로면 어떨까? 베이징사범대를 졸업하고 돌아올 자랑스러운 나의 딸이자 웨이의 누나로 말이야.

루홍의 눈치 따윈 볼 필요 없어. 지금까지는 내가 그 애 체면을 많이 봐줬지만 앞으론 어림없어.

웨이에게조차 말하지 말고, 너와 나의 비밀로 간직한 채 지금까지처럼 행복하게 지내는 거야. 응?

이 디에를 봐서라도.”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어렵게 밀문을 열었다.


“디에. 우린 되돌아갈 수 없어요.

마음을 부서지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사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이 이미 알고 있었어요.

디에가 사과상자를 들고 어머니와 살던 단칸방 집으로 찾아왔을 때부터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상자째 선물해주는 사람에게 내 진짜 이름조차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게 많이 부끄러웠어요.

어머니도 나도 디에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말하지 못한 거예요.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모두가 저희처럼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거짓 신분으로 위장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속이며 사는 건 아니니까요.

디에. 정말 미안해요.”


디에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결국 받아들여 체념한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나는 오른팔을 뻗어 디에의 왼쪽 팔목을 가볍게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얼음강물 건너편에서 나와 어머니를 지켜보고 서 있던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점점 또렷해졌다.

미동도 소리도 없이 꿋꿋이 서 있는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거친 얼굴에 얼음이 맺히고 있었다.


초여름 마당 건너편에서 단단한 겨울나무 같은 아버지가, 디에를 여기에 두고 강물 앞에 서있는 나를, 그때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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