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맨날 아파요?" 그러게요!

어쩌면 당신 편이 되어주려고 그런지도 모르죠.

by 어진의

만성적인 고통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가 되자 귀신같이 컨디션이 악화되었다. 어떻게든 루틴을 만들어 내가 식사를 하는 것은 죄가 아니며 바깥을 걸으며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도 현실도피가 아니라고 몸에 새겨 넣으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마치 파도처럼 가끔은 잔잔히 가라앉은 뒤에는 반드시 치솟아 나를 부수러 온다.


대학병원의 외래 의사로는 도저히 지속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없어 개인병원을 전전하는 동안, 나는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F코드를 받는 것은 보험에 악영향을 미치니 한 번의 상담이라면 Z코드를 쓰겠다고. Z코드는 약물 처방이 되지 않는 1회용 상담을 의미하고, 나는 내 상태가 약물의 도움 없이 나아야만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얼마간 더 악화되었다.


내게 Z코드만을 준 의사들은 분명 '창창한 나이인 처녀'(실제로 들은 표현이다)에게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찍혀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내 병이 묵고 또 묵어 끝내 뇌를 잘라내는 듯한 원인 불명의 편두통에 응급실에 실려가거나, 길거리에서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공황발작을 일으킬 때가 되어서야, 이 환자에게는 나중의 보험이 중요하지 않다고 의사들도 이해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현재, 나는 같은 개인병원에 5년째 다니고 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내 회복 경과를 누구보다 기뻐해주신 여성 분이신데, 공교롭게도 내 어머니와 비슷한 나잇대다. 나는 그분의 정중하고 세심한 조언에 따를 때마다 이 사람의 딸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좋게든 나쁘게든 개념적 모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마더 이슈(Mother Issue)라고 하는 모양이다.


꽤 오랜 시간, 정신과 의사 선생님과 나는 병을 조금이래도 덜 무서워하며 버텨내기 위해 이인삼각 중이다. 반년 전부터 조심스럽게 약을 조정하면서 조금이라도 수면제를 줄여보기로 했기에, 지난주는 오랜만에 자율신경계 검사를 했다. 아쉽게도 부교감신경 활성화 비율이 상상 이상으로 낮아 자율신경실조증인 것이 확정되었고, 결국 이번에도 수면제를 줄이긴커녕 항불안제가 증량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속 아픈 몸이라는 것은 계속 노동을 할 수 없는 몸이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노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안정적인 수익원을 가지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여러분이 내게 궁금한 점 중에는 어떻게 대학 두 곳을 그만둬야 할 정도로 아픈데도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는가, 도 분명 있으리라.


열악한 조건뿐인 상황에서도 내가 생존한 것은 순전히 글솜씨 덕이다. 엽서시문학공모전은 내게 알바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내게 해당하는 공고라면 닥치는 대로 붙잡아 무슨 내용의 글이든 써 내려간 것도 알바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 놓인 여성 예술가에게 기대되는, 현실을 넘어설 수 있을 정도의 숭고한 의지 같은 것은 그 시절의 내게 전혀 없었다. 죽고 싶다는 순수한 감정은 날카로운 글을 배설할 수 있게는 해주지만 사람을 숭고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내 비명이 들리지 않는 것만 같은 이 진공의 세계를 내가 견뎌야 할 이유는, 꼭 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은 내게 "대체 왜 맨날 아파요?"하고 물었던 아이들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첫 번째 휴학을 마치고 복학한 나는 3학년이 되었다. 당시 몸상태는 고작 걸어서 10분 거리인 대학까지 걸어갈 수 없어 빙 돌아 버스 정류장을 찾아 타고 가야만 할 정도로 처참했다.

그러던 중에도, 사범대에서는 졸업을 위해 교육봉사를 해야만 했다. 나는 교직에 종사하기를 이미 포기했지만, 아직 대학 졸업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대학 인근의 남중에서 교육봉사를 하게 되었다.


봄에서 여름까지 세 달 동안 내가 참여하게 된 교육봉사는, 환경이 여의치 않아 성적이 나쁜 학생 대여섯 명을 한 조로 묶어 숙제나 학업 진도 등을 봐주는 나머지 공부였다. 나는 같은 학교 국어교육과에 다니는 분과 교실 하나를 반으로 나누어 썼다. 복도 쪽에는 그분의 학생들, 창가 쪽에는 내 학생들이 앉게 되었다.


나는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항상 진통제와 안정제를 삼켰다. 그럼 아이들을 봐주는 2시간 만은 통증이나 공황에 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선생님은 대체 왜 맨날 아파요?"


어째선지 곧장 마음의 거리를 좁혀온 아이들이 물었다.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들 나름대로 내가 궁금하고 걱정되어 묻는 것임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남으면 항상 운동장에서 뛰며 공놀이를 한다는 약간 매운 땀냄새가 나는 까무잡잡한 그 아이들에게, 항상 낯이 창백하고 목소리를 크게 내는 법이 없는 방과 후 선생님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알았기에, 도리어 나는 오래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너희처럼 운동장에서 뛰었다간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프고, 심하면 눈앞이 시꺼멓게 변하며 쓰러진다.
매일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입에 들어가야 할 약과 음식 때문에 머지않은 미래의 내게 빚이 쌓여가고, 그럼에도 졸업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너희와 이 오후를 함께 보내야만 한다.
너희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책 안의 활자들이 내게는 나를 지킬 성채를 세울 유일한 도구다.


그런 말들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내가 불행했다고 하여, 각자의 불행을 안고 있을 아이에게 아직 몰라도 좋을 것을 알게 할 권리는 없는데.


"그러게요!"하고 쾌활하게 말하며 웃는 것이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교육봉사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 문제도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나는 온갖 모진 인간군상에 비하면 당시 아이들은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하지도 않고, 한 주 방과 후 교실에 빠졌으면 모르는 점을 공책에 적어서 그다음 주에는 꼭 나왔다.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황혼이 드리운 교실에 앉아 학교 측에 제출할 것과는 별도로 그날의 학업 진도를 내 공책에 적고 있을 때, 나는 솔직히 내가 유난히 착한 아이들을 만난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을 기다려주고, 주의 깊게 잘 듣기만 하면, 그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런데 내 봉사 일지를 검사하는 그 학교의 정교사나 나와 같은 교실을 반으로 나누어 다른 학생을 돌보던 국어교육과 학우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10 + 7도 모르고 중학교에 온 애였는데, 이제 인수분해를 가르치고 있다고?"


정교사는 나를 아주 신기한 것 보는 눈으로 한참 위아래로 훑었다.


"학우님, 저기. 제가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학우님이 맡으신 아이 중에 집안에 문제가 있는 친구가 좀 많아요. 실은 담당 선생님이 제가 아는 분이라, 성적이 우수하고 환경에 큰 문제가 없는 쪽을 제 쪽에 붙여 주셨다고 해서. 저도 정말 몰랐어요. 정말 안 힘드세요?"


학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쉬운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것을 미안해했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문제도 없었다.


처음에는 같은 조의 다른 아이를 때리려고 드는 아이가 있었다. 조는 것을 깨우면 내 앞에서 욕을 뱉는 아이도 있었다. 10+7의 답을 써보라고 했더니 107이라고 쓰는 아이도 있었다. 국어책 표지의 인물을 칼로 깎아 외설스러운 낙서로 만드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다만 그 아이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궁금해 눈을 마주하고 물어보았다. 들은 이유가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어서 다르게 행동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공부와는 무관해 보이는 그 아이들의 가정 문제를 모두 기억하는 것은 A+을 맞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나는 정말로 그 아이들의 마음이 궁금했고, 곧잘 "괜찮아요?"하고 묻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한 주에 이틀. 학교가 끝나고 두 시간씩.

그 아이들은 내 앞에서는 나쁘게 굴지 않았다.






교육봉사를 마치던 날. 처음에는 10+7을 107이라고 쓸 정도로 학습진도가 늦었지만 끝내 여름 방학 전에 다른 아이들의 진도를 따라잡은, 가장 나를 따랐던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우리 학교 또 올 거예요?"

"그러곤 싶은데, 그때쯤이면 00가 이 학교에 없겠죠?"


거짓말치곤 매끄러웠지.


"선생님은 왜 다른 선생님이랑 달라요?"

"제가 뭐가 다른데요?"


다른 아이들이 끼어들었다.


"항상 존댓말 써요!"

"멍청한 새끼라고 욕도 안 하잖아요."

"괜찮냐고 자주 물어보고."

"존나 안 괜찮은 날에는 과자도 사주고!"


그리곤 우리 선생님의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어떤 부분은 솔직히 밥맛이었는지, 제멋대로 한참을 떠들어대던 아이들이 내게 물었다.


"선생님도 우리랑 있는 거 괜찮았어요?"


나는 어쩐지 그 말이 굉장히 사무쳐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 아이들은 당황해서 본색을 드러냈다. 아직도 그 대화가 너무 우스워서 토시 하나 빠짐없이 기억이 난다.


"왁 씨발 쌤 울어!"

"선생님 또 아파요?! 그건가? 생리?"

"미친 새끼야 그거 대놓고 말하면 안 돼!"

"아 씨 음료수라도 뽑아와? 단 거? 울 누나년은 단 거 먹음 풀리던데?"

"니네 누나는 고딩이잖아 새끼야 대딩인 선생님하고 같냐?!"

"아님 약 사 올까? 나 정문까지 5분 컷 가능!"

"븅신아 선생님 먹는 약 알기나 함?"

"보건실 가면, 썅, 문 닫았겠지?!"


결국 자리를 비웠던 국어교육과 학우가 돌아와 내게 텀블러에 든 보리차와 차갑게 적신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기껏 내 앞에서는 말씨를 다 고쳤던 중학교 2학년 녀석들은 "사실 쌤 없으면 저희끼린 욕도 쫌 쓰구 그래요."하고 마지막 고해 같은 것을 하고 멋쩍어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때 그 아이들에게 받은 것은, 진공과도 같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마냥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까슬까슬한 애정이었다.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중학교 정문까지 이어지는 고갯길은 구두를 신고 내려가기에는 가팔랐기에 국어교육과 학우님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분은 내 쪽을 일부러 보지 않고 부축만 해주다가 흘러가듯 물었다.


"학우님…. 많이 아프셔서 교직은 못하실 것 같댔죠?"

"예, 맞아요.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이 누굴 가르치면 안 되겠죠."

"저도, 실은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학우님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천천히 정문으로 내려가는 동안 해가 저물어갔다. 하늘은 온갖 색의 빛살로 일렁였다. 오늘날에는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 색보다도 더욱 다채롭고, 또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학우님이 맡은 아이들은 정말 제일 문제아들이었어요. 아직 학우님이 안 오시고 저만 있을 때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니까요? 교무실에서 듣자니 작년에는 교육봉사 온 분이 맘에 안 든다고 그냥 아예 단체로 결석했대요."

"걔들이 그랬어요? 죄송해요, 학우님."

"죄송하다는 말 들으려고 하는 소리 아니에요! 사실, 똑같은 시간을 보냈는데 부끄럽게도…. 제가 맡은 아이들은 제 이름도 몰라요. 방과 후에 남는 것도 싫어해요. 무엇보다 다시 이 학교에 올 거냐고, 자기들을 만나줄 거냐고 묻지도 않았네요."


정문을 지나서야 부축을 그만두고 나를 돌아본 미래의 선생님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떤 때는 아파본 사람만이 다른 아픈 사람 편을 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을 하지 않더라도 학우님은 지금처럼 저런 아이들 편을 들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먼저 들어갈게요! 하고 멀어지던 그 사람의 씩씩한 걸음걸이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미치지 않은 나는, 얻어맞지 않은 나는, 아프지 않은 나는 분명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으리라.

고작 성적표 따위에 앞으로의 자기 목숨을 다 걸지도 않고, 아플 때는 아프다고 파트너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자신이 해낸 일을 돌아보며 스스로 감탄하며 나는 역시 천재야!라고 상기된 낯으로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교육 봉사 마지막 시간을 그렇게 강렬한 말들과 함께 끝내고도, 나는 극적으로 회복하지는 못했다. 약은 점점 듣지 않게 되어 더 커지고 개수도 늘었으며, 완전히 관계를 끊지 못한 본가에 찾아갈 때마다 어머니의 히스테리와 오빠의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아버지는 어땠냐고? 내가 중학생일 때부터 사이비 종교를 믿더니 암에 걸렸는데도 그 종교에서 파는 약물을 사던 아버지 이야기? 너무 답이 없어서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 싶지도 않다.


자격 없는 나를 선생님으로 인정해 주었던 그 아이들과의 시간이 끝나고도 나는 괜찮지 못했다. 파트너와 함께 하는 것조차도 사치스럽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관계를 끊고 죽으려고 했다. 내가 교직을 택하지 않은 것은 분명 옳았다.

그러나 만일 그때의 내가 방황하던 그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에 드는 선생님이었다면, 그래서 책상에 앉아 샤프를 붙잡았을 때 아주 조금이라도 힘내보자는 생각이 들게 했다면, 그래서 결국 그 아이들이 이 지긋지긋한 시간을 넘어 어디선가 어른이 되어 있다면.


나는 그때의 내 고통이, 그 아이들 편이 되어주기 위해 있었던 것이라는 말을 들어도, 화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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