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가난하다.
나는 29살이고, 누나들은 30대 중후반이지만, 연애할 여유조차도 없는 게 현실이다.
부모님은 항상 우리에게 미안해하신다. 빚에 허덕이는 삶을 물려주는 게 너무 불행하다고
나는 지금 정말 기적적이게도 서울의 안정적인 공기업에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 형편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매달 월급의 반 이상을 지원하지만, 갚아나가야 할 빚이 줄어드는 느낌은 아니다.
그런데도, 난 왜 행복할까. 세상 기준에서 나는 불행해도 모자랄 판인데
차갑고 비즈니스적인 사회생활에 나 자신을 점점 잃어가는 느낌일 때
집에 가는 것이 일종의 치유가 된 것은, 아마도 가족들과 있는 시간이 유일하게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 아닐까.
'아름답다'의 어원이 '나답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변동되는 이 사회 속에서 내가 나 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가 나를 잃어버렸을 때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가 들어온다.
세상의 기준 타인의 기준을 맞춰주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다가는 뼈다귀만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해도 발버둥 쳐도 아무것도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준의 잣대.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엄격해지고 남들에게 관대해지는 불행을 선택했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 기준에 맞춰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동안에,
내가 나의 가치의 기준을 정해버린 바람에, 나는 그 이상을 발전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나의 가치관 등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다시 시작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 나일 수 있는 공간에서
내가 왜 나일 수 있었나? 그때의 나는 무엇을 원했나?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내 삶을 결정 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 자신을 찾으라라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타인에게 비추곤 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크게 판단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삶을 살아 본 게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으며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과 평가에 올라가고 싶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라지만
나는 조금은 그들을 이해하고 싶다.
그냥 한없이 친절하고 싶고 따듯하고 싶다.
사회적 기준, 평가들에 어긋나있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찬란하게 살아가고 있다.
조금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돈이 남들보다 없을지라도
나다워지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도 강요로 느껴진다면. 듣지 않는 자세도 길러야 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나 자신을 포기해온 세월을 후회하고 그 사실이 정말 가슴 아프지만.
다시 일어나 보려 한다. 나 자신에게 기대를 걸어
내가 일어서는 날. 나와 같이 포기한 채 사는 인생들에게
따듯하고 진심 어린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
그 귀중한 시간.
오늘도 나는 '나답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