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도토리묵
회사원 두철은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출근하는 사람들과 같이 지하철을 탈 생각에 벌써부터 힘이 빠진다.
매일 지하철 안에서는 내려야 할 역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내릴 수는 있을지 걱정한다.
아침부터 기는 다 빨린 채 출근하고 나면, 그때부터 업무시작이다.
커피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하고 유일한 쉬는 시간인 점심시간에도 두철에겐 사회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모든 일이 끝나고 집에 가면 책 한 권 읽고 운동도 하고 자야겠다는 소소한 목표는 이루지 못한 채
유튜브 쇼츠를 보다가 잠이 든다.
그렇게 똑같은 패턴, 똑같은 루트, 똑같은 일상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두철은 자신의 인생이 참 재미없다고 생각한다. 너무 무난하고 심심한 인생 그 자체.
두철은 다짐했다. 오늘은 퇴근 후 바로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닌 색다른 일을 해보겠다고.
두철은 하루 종일 고민한다. 퇴근 후 무엇을 할까? 일상에서 벗어나 혼자 무엇인가를 해본 적이
하도 오래돼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퇴근 후, 두철은 어디로 갈지 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핸드폰으로 근처 놀거리, 근처 맛집을 찾아보면서 걷는 도중에 저 멀리서 바람에 짤랑짤랑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철이 앞을 보니 예전에는 본 적 없었던 울창한 도토리나무들이 서있는 숲의 입구가 보였다.
숲의 입구로 가까이 가서 보니, 큰 도토리나무에 작은 방울들이 바람에 소리를 내고 있었고,
나무 정가운데 팻말에는 작고 귀여운 글씨로 '도토리 숲'이라고 적혀있었다.
두철은 평소 산을 좋아하지 않지만, 선선한 바람에 이끌려 뭔가에 홀린 듯 도토리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도토리 숲의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니
어느덧 해는 지고 점점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두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이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멈춘 순간
저 멀리 도토리 숲 그늘아래 작은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불빛을 자세히 보니 그늘아래 작은 오두막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빛뿐만 아니라 덜그럭 덜그럭 대는 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퍼지는 도토리 냄새가 마치 두철을 오두막으로 부르는 것 같았다.
"똑똑똑" 두철이 오두막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달그락 소리가 멈추더니,
어떤 한 여자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두철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오두막 안은 따스한 불빛과 더불어 구수한 도토리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여자는 두철에게 “도토리 묵을 쑤고 있었는데 저녁 안 드셨으면 드시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나무 테이블에 앉은 두철은 왜인지 모르게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달그락달그락 분주하게 요리하는 소리가 작은 오두막 안에서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여자는 이쁜 무늬가 있는 그릇에 직접 만든 도토리묵과 도토리묵과 곁들여 먹을
봄동겉절이를 내왔다. 도토리묵은 찰랑찰랑 윤기 있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두철이 아무 대가 없이 먹어도 되냐고 묻자, 여자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철은 도토리묵을 숟가락으로
잘라 한입 베어 물었다. 도토리묵은 조금은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도토리의 향, 그리고 그 향을 해치지 않을 만큼의 고소한 참기름 맛이 어우러져 계속 먹어도 물리지 않을 심심하면서도 중독적인 맛이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심심한 맛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행복이 느껴졌다.
두철은 다음으로는 옆에 있는 봄동겉절이를 먹어보았다.
봄동 겉절이는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아삭한 식감을 가지고 있어
도토리묵의 부드러운 식감과 대비되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두철이 감탄을 하며 도토리묵을 먹는데
"똑.. 똑" 갑자기 테이블에 두철의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심심하고 부드러운 도토리묵 계속해서 먹어도 질리지 않을 이 맛은
두철이 어렸을 적 직접 도토리가루를 사 와 큰 냄비에 주걱으로 정성스럽게 돌려가며
만든 엄마의 도토리묵 맛이었다. 두철은 그 맛이 기억나자마자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던 엄마의 따듯한 사랑이 두철의 공허했던 마음을 채워주는 듯했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도 지나 보면, 너무도 돌아가고 싶은 추억이었다.
두철은 아침에 눈을 뜨며 반복되는 이 일상이 너무 고통스럽고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을 반성했다.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도 그 일상이 주어짐에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했다.
여자는 그런 두철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두철에게 말했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에요"
두철이 '짤랑짤랑' 방울소리에 눈을 떴더니, 오두막은 온데간데없고
도토리나무의 방울만 바람에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두철은 이 믿을 수 없는 신기한 경험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다음날 아침 두철은
똑같은 패턴, 똑같은 루트, 똑같은 일상을 맞이한다.
하지만 똑같은 일상에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
두철에게 반복된 일상 속에서도
행복과 감사를 찾을 수 있는 작은 마음이
작은 새싹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