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숲 그늘아래 [커피]

12. 커피

by 익명의 작가

경선은 지방에 있는 시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경선의 나이 34세. 안정적인 직장과 조용했던 삶에서 경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일이 일어난다.

평소와 똑같았던 어느 날, 경선의 직장상사는 경선에게 말했다.

"경선 씨 내가 어제 부탁했던 서류 아직 안 보냈던데 지금 보내줄 수 있나?"

직장상사의 말을 듣고 있던 경선은 적잖이 당황한다.

어제 직장상사의 말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선은 미묘하게 일상생활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예를 들면, 어제 집에 들어가서 뭘 하다 잠이 들었는지, 집으로 가는 버스 번호가 무엇이었는지와 같은

사소하지만 항상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던 사실들이 점점 머리를 쥐어짜 내야 나오는 느낌이었다.

최근 야근을 자주 해서 머리가 멍한 상태인 것인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오늘 직장상사의 말을 듣고 도무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할 따름이었다.

일상생활에서 해당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경선은 병원에서 해당 증상을 말하고, 정밀 검사를 받아본다.

경선의 정밀 검사 결과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경선의 담당의사의 말에 따르면, 경선은 조금씩 경선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지워지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경선은 덜컥 겁이 났다. 평범하다면 평범했던 그녀의 일상이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

경선은 집에 가자마자 낡은 옛 사진첩을 뒤져본다. 사진 속에 행복해 보이는 경선의 어린 시절,

아빠, 엄마와 찍은 사진 오빠와 여동생과 찍은 사진을 보며 절망을 느꼈다.

이제 곧 사라질 경선의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경선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모래알처럼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빠르게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갔다.

슬프게 울고 웃었던 방법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점점 무미건조해졌고,

일을 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선은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적어놓은 일기를 보며

더욱더 절망에 빠졌다. 일기를 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선은 어젯밤 쓴 일기의 내용대로 오늘 삶을 포기하려고 다짐했다.

경선은 기억이 한 톨이라도 남았을 때 경선으로써 죽고 싶었다.

경선이 죽고자 다짐한 뒤, 집 밖을 나가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조금씩 들리는 방울소리

'짤랑짤랑'

방울소리는 큰 도토리나무에서 나고 있었다.

도토리나무의 팻말에는 '도토리 숲'이라고 적혀있었다.

경선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리다 도토리 숲 안으로 들어간다.

경선의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로 도토리 숲은 고요했다.

고요한 도토리 숲을 걸면서 경선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여기서 걷고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진한 커피 향이 바람을 타고 경선에게 다가왔다.

'커피 향 좋다'

경선이 진하고 싱그러운 커피 향을 따라 걸어갔을 때

도토리 숲 그늘아래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경선은 오두막 문을 두드려본다.

'똑똑똑'

오두막 문이 열리고 흰색 머리의 할머니가 방긋 웃으면서 경선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방금 커피를 내렸는데.."

나무 테이블에 경선을 앉힌 할머니는

커피와 각설탕을 내왔다.

경선은 진한 커피 향에 취한 듯 커피를 한 모금 먹었다.

커피는 깊으면서도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듯했다. 커피의 깊은 풍미 끝에 약간은 씁쓸한 맛이

경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왜 경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을까.

경선은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경선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말했다.

"이번엔 각설탕을 넣고 드셔 보세요."

경선은 커피에 각설탕을 넣고 각설탕이 녹을 때까지 천천히 휘저었다.

각설탕을 녹이면서, 신기하게도 경선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기 때부터 현재까지 천천히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경선은 잠깐이지만 아침까지만 해도 하나도 기억 안 나던 것들이 기억이 나자,

조각조각난 기억들을 하나하나 느끼며 당연하다고 느꼈던 감정들, 소소한 일상들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깨달았다.

경선은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잠깐이지만.. 기억이 났어요 분명 모든 기억들이 뒤죽박죽이었는데.."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경선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힘들고 지친 사람들의 추억이나 기억들이 담긴 음식을 대접하면서, 그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일을 합니다."

"이 중요한 일을 경선 씨가 해주셨으면 해요. 다른 사람들의 기억들을 찾아주면서 분명히 경선 씨의 기억들도 함께 찾아갈 수 있을 겁니다."

경선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대접한 커피를 마실 때

느꼈던 작은 위안이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경선의 마음을 움직였다. 거창한 말과 행동 없이 이 작은 커피 한잔이 경선에게 주는 위로는 컸다. 경선은 자신처럼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소중한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선은 미소를 띠며 할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경선이 어떻게 도토리 그늘아래

오두막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지

과거를 회상하며

커피를 내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삶에 지친 누군가가 오두막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경선은 오두막 문을 열며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들어오세요. 안 그래도 방금 커피를 내리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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