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짬뽕
경식은 자녀 셋의 가장이다. 경식의 아내는 정말 순수하고 귀여운 사람이었고, 그의 자식들은 항상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경식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온 사람이었다.
항상 성실하게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가족들과의 저녁시간 함께 나누는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가장 행복했던 경식은 점점 돈 앞에 불행해지는 가족들을 보며,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돈 앞에서는 무너 저 내리는 것일까.
경식은 자신이 과거에 했던 선택들을 생각해 본다.
마을에서 가장 부유하게 자랐던 그는 돈가스 집을 운영하며 사랑스러운 아내와 결혼하고,
자식 세명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돈가스 집을 운영하다 다른 사업을 제안한 형의 부탁에, 평소 아버지처럼 따랐던 형이기에
덜컥 돈가스 집을 정리하고 동업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아버지만큼 의지했던 형은 전혀 동생을 책임질 생각이 없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말만 동업이었을 뿐, 모든 일은 경식이 감당해내야 했고 책임져야 했다.
그렇게 형과 같이 동업한 사업이 실패한 후, 경식은 좌절했지만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곱게 자라 힘든 일은 해보지 않았던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공사장에 나가서 일을 시작했다.
매일밤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 헛소리를 하던 그는 눈물을 참아가며 독하게 마음을 먹었었다.
몸과 마음이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었다.
지난날들을 생각해 보니 경식의 마음이 울컥했다.
'참 나도 많이 늙었나 보다.. 요즘은 별것 아닌 일에도 이렇게 울컥하니 원..'
오늘은 경식의 아들이 살고 있는 고시원에
아들이 ‘겨울옷을 가져다 달라’는 말을 듣고
겨울옷을 옮겨주러 가는 날이다.
경식은 아들이 작은 고시원에 살게 하는 것이 자기 잘못인 것만 같아 미안하다.
또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아들에게 고마웠다. 경식이 아들에게 짐을 전달하고
집으로 오는 길 경식은 길가에 차를 대고 눈물을 훔친다. 햇빛 하나 들지 않은 작은 고시원에서 직장에
취직했는데도 원룸하나를 못 얻고 고시원에서 살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경식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때 길가 옆에 있던 숲 사이에서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짤랑짤랑'
서글픈 경식의 마음을 달래주듯 울리는 방울소리에 이끌려
차를 세워두고 경식은 숲 안으로 들어간다.
숲 안에 방울소리가 나는 곳은
높게 뻗어있는 도토리나무였다.
경식은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도토리나무 숲 사이를 헤집고 들어간다.
경식은 숲 안에서 따듯한 불빛을 내뿜는 오두막집을 발견한다.
도토리 숲 그늘아래 그 오두막집에서는 경식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짬뽕의 냄새가 강렬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는 짬뽕냄새에 이끌려 오두막에 도착했다.
그러자 오두막집에서는 어떤 여자가 나오며 경식에게 말했다.
"짬뽕 한 그릇 드시고 가세요."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간 경식은 따듯한 오두막집의 온기에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낀다.
나무 테이블에 경식을 앉힌 그녀는 경식에게 짬뽕 한 그릇을 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짬뽕을 보고 있자니 입맛이 없던 경식은 군침이 돌았다.
짬뽕은 깊고 진한 육수와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인지 탱탱한 면발이 얼러져 따듯하게 경식의 마음을 녹여주는 듯했다. 짬뽕을 먹다 보니 경식은 아들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들이 중학생이었던 시절 아내의 깜짝 제안에 아들과 둘이 전국여행을 했던 기억이었다.
그렇게 정말 갑작스럽게 시작된 아들과의 전국여행은 경식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아들은 자신이 직접 전국여행 계획을 짠다며 이것저것 검색해 보고 행복해했다.
그때 아들과 함께 여행하다 배고파서 우연히 들어간 중식당이 있다.
'그곳에서 먹었던 짬뽕이 정말 맛있었는데'
아들도 지금까지 먹었던 짬뽕 중에 가장 맛있었다고 했다.
경식은 짬뽕을 대접한 그녀에게 한참 동안 아들과의 전국여행을 자랑했다.
경식의 여행담을 듣고 있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아들분은 그때 아빠와 함께 짬뽕을 같이 먹었던 시간 자체가 행복했던 것 아닐까요?"
경식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작은 고시원에서 살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아빠에게 '고맙다'라고 말했던 아들이 생각이 났다.
경식의 아들이 여행 중 아빠와 먹었던 짬뽕과 숙소에서 밤늦게 아빠와 먹던 컵라면이 가장 맛있었고 행복한 기억이라 했던 것처럼 중요한 것은 돈이 많고 적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경식에게 가족들과 함께한 모든 시간과 모든 순간들이, 짬뽕처럼 한데 어우러져 감사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그 소중한 시간들로 함께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짤랑짤랑'
방울소리에 흠칫 놀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경식의 앞에 그녀가 사라지고 없었다. 오두막도 짬뽕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차 안에서 내가 조금 졸았었나 보다'
그때 경식의 휴대폰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아들의 문자메시지였다.
'아빠 집에 잘 도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