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여행지도 직접 겪어봐야 제대로 아는 법이다
멀리 보이는 황량한 산을 바라보지 않을 때,
라스베가스는 사막 위에 세워진 도시임을 망각하게 한다.
해안도시처럼 곧게 뻗은 야자수들은 도로 옆으로 즐비하게 펼쳐진다. 번화가인 메인 스트릿을 지나 금세 접어들게 되는 주택가는 평화로워 보였다. 렌트한 자동차를 운전해 주택가 사이사이를 지나가는데, 갖가지 식물들로 가지런히 꾸며진 집들이 끝없이 눈을 사로잡았다.
서울보다 더 많은 나무들이 집안팎에 보이는 여기가, 정녕 사막 위에 있는 도시가 맞는 걸까. 집집마다 진녹색을 뽐내고 있는 잔디와 나무들. 자연의 섭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푸른 나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 라스베가스.
라스베가스의 낮 풍경은 그렇게, 나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채색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라스베가스에도 스쿨버스가 있어
미국 영화에서 보았던 커다란 노란 스쿨버스가 지나갔다. 라스베가스에도 초중고, 대학교가 있다고 한다. 사실, 네바다주에서 라스베가스가 인구 200만 정도로 가장 큰 도시라고 한다. 도시에 학교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나는 이렇게 깜짝 놀랐을까. 영화나 미디어를 통해서 내게 각인된 라스베가스의 이미지가 그저 카지노와 환락의 도시였기 때문일 것이다. 십 수년간 박혀있던 이 곳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은 시내를 둘러보면서 반나절만에 산산이 조각났다. 그렇지,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구나. 역시 사람도, 여행지도 직접 겪어봐야 제대로 아는 법이다.
사실 라스베가스에 며칠 머무르면서 그랜드캐년을 가고자 했지만, 체력이 되지 않고 일정도 빠듯했다. 그 대신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레드락캐년을 가게 됐다. 라스베가스에서 의도치 않게 대자연의 광활함을 덤으로 보게 된 격이었다.
사막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모하비 사막에 있는 레드락 캐년은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엄숙해지는 장엄한 광경을 보여준다. 인위적인 라스베가스의 화려함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황홀했던 그 순간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날 것 그대로 대자연의 속살을 마주하게 되는 감동이 바로 이런 것일까. 열정적인 붉은빛 물결이 온 바위와 산을 뒤덮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가슴 한켠에서 무엇인가 탁 터져나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자연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아름다움이 주는 숭고함 같은 것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물론 라스베가스의 밤은 예상대로 화려한 별천지 그 자체였다.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라스베가스의 메인 스트릿에 발을 디디는 순간, 누구든지 그 화려함에 압도되고 말 것이다. 모든 호텔들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간다며 웅장함과 화려함을 뽐내고 있고, 눈이 휘둥그레 질 정도로 휘황찬란한 온갖 종류의 네온사인이 시선을 어지럽힌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으로 발 디딜 곳 없이 시끌벅적한 거리, 비보잉을 하며 밝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흑인댄서 무리들, 꼭 한 번은 봐야 한다는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속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흥이 솟아나게 된다.
한 켠에서는 텀블러에 술을 담아 비틀비틀 길을 걸으며 음주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볼 수 있고, 절대 그 누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도록 호텔마다 로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알록달록한 카지노와 1 페니의 돈으로 잭팟을 터트릴 행운이 터지길 바라며 밤이 새도록 그 속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일탈의 꿈, 한 탕의 꿈, 모든 욕망이 단 하룻밤에 실현될 수 없다 할지라도 누구든지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는 도시. 그렇게 허락된 욕망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끊임없이 부르고, 그 욕망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밤이 깊어질수록 라스베가스를 가득 메운다.
사실 라스베가스를 찾아온 이유 중 하나는, 꼭 한번 '태양의 서커스'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말로만 듣던 그 예술의 경지가 무엇일까, 얼마나 대단한 공연인지 실제로 보고 느끼고 싶었다. 몇 달 전에 미리 예매한 표를 들고 공연장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모든 공연이 끝나고 나올 때까지 부족할 것 없이 완벽했던 공연. 배우들이 하늘을 무대 삼아 날아다니고 음악, 미술, 무용, 연기, 스토리가 하나 되어 어우러졌다. 나 같은 예술 문외한이 보기에도 정말 최상의 예술을 선사하는 공연이었다. 그 완벽했던 화려함에 취해 끝나고 일어설 때 현기증이 날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극찬의 박수가 저절로 튀어나오게 만든 그 공연이 끝났을 때, 정말 온갖 자극들이 몸속에 한 번에 주입된 느낌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그만큼 아쉬움이 밀려왔다.
"이제 뭘 봐도 소용이 없겠네"
앞으로 어떤 공연을 보아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바로 그 순간 느꼈던 것 같다. 이런 멋진 예술을 볼 기회가 과연 다시 생기게 될까.
라스베가스는 하루 만에 수십 가지의 감정을 동시 다발적으로 느끼게 하는 도시다. 무엇인가에 순식간에 눈을 홀려 나 자신에 대해 아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다가도, 금세 정적 속에 잠잠히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곳. 그동안 잠자고 있던 내 모든 감각이 깨어났다가, 그 모든 감각이 홀연히 사라지게 하는 그런 곳.
모든 일정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 창문 너머로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니, 그 모든 찬란함이 돌연히 사라져버린 채 정적 속에 희미한 불빛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방금 내 눈 앞에 보이던 화려한 네온사인도, 예술의 경지에 오른 배우들의 공연도 모두 하룻밤의 신기루 같다. 화려함 속에 감추고 있는 이 도시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에너지가 넘치다가도 불이 꺼진 듯 갑자기 침잠해버리고 마는 나 역시, 무엇이 진짜 모습일까.
소음이 들리지 않으니 도시 전체가 어두운 사막 속에서 고요히 숨죽이고 있는듯하다. 저 멀리 보이는 높이 솟은 호텔들의 육중한 몸매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네온사인만이 욕망의 불씨를 꺼지게 하지 말라며 내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