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fe Like Song Jan 14. 2024

Track00. 일어나

2013년 01월. 스페인 그라뇽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신 이유가 뭐예요?”


 오래된 취미의 기원을 추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의 일은 분명 과거의 선택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경로에는 계속해온 이유 역시 존재한다. 유화(油畵)를 그리는 것처럼, 처음의 밑그림 위엔 수많은 이유와 선택이 덧칠해진다. 결국 눈에 띄는 건 가장 마지막에 칠한 색깔 뿐이다.


  물론 예외는 존재한다. 나는 기타를 배운 이유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일단 시작의 계기가 강렬했다. 두꺼운 검은 물감처럼. 강렬한 체험은 계속해서 따라 그릴 수 있는 선을 제공한다. 1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선이 가진 형체는 내 마음속에 존재한다.


 감자 굽는 냄새가 올라오던 스페인 시골. 500년 된 교회의 돌담과 나란히. 낡은 기타를 매고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던 K형의 모습을 추억한다.

2013년 1월.


 “이건 우리 알베르게(Albergue:스페인의 순례자 전용 숙소) 전통인데, 저녁 요리를 받아올 땐 모두가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해야 해. “

 “무슨 노래? 스페인 민요?”
 “정해진 노래는 없어. 그건 순례자들끼리 상의해서 정하는 거야. 한국 노래를 하든 미국 노래를 하든.”
  우리는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숙소에 있는 한국인과 외국인의 비율이 거의 5:5 수준이었으므로, 유명한 팝송이나 '학교종이 땡땡땡'같은 쉬운 노래들이 물망에 올랐다. 그런데 미국인 친구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어제 한국요리 먹으면서 부른 거 있잖아. '이르나~ 이르나~'하는 거. 따라 부르기도 쉽고 K가 기타로도 칠 수 있으니 딱일 것 같은데?” 


 그녀가 제안한 노래는 김광석의 '일어나'였다. 어제저녁 다른 도시에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몇몇 노래를 불렀는데, 그중 하나를 그녀가 기억해낸 것이다. 스페인 아저씨 셋과 캐나다 친구 역시 동의했다. 우린 식탁에 모여 급하게 노래를 연습했다.

 동영상을 찍기로 한 친구가 맨 앞에서 뒤를 보고 걷고, K형이 기타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움직이면서 기타를 연주하기 어려우니 몇 걸음 미리 가서 앉아 전주를 연주하면, 비로소 본대가 등장한다는 작전이었다. K형이 걸어 나가고 짧은 정적. 보네니또-. 알 수 없는 스페인어 응원을 신호로 반주가 들려왔다. 이제 삼삼오오 모인 한국인 셋과 외국인 다섯이 움직일 차례였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불러 봐도 소용 없었지......”


 검은 밤의 가운데서 시작된 노래가 시골길을 따라 골목골목 문을 두드렸다. 발걸음이 경쾌해지고,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시골마을 그라뇽(Granon)의 거리에는 20명이 약간 안 되는 사람들이 마중나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스페인 시골마을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김광석 노래를 부르다니! 일행은 고무되어 힘차게 후렴구를 이어갔다. 이어지는 짧은 박수와 환호. 그리고 빵집 아주머니의 센스있는 한 마디.


 “좋은데? 그러니까 한 곡 더 들어야겠어.”


 이어지는 그의 선곡은 '먼지가 되어'였다.

 그날 밤, 나는 알베르게 식탁에 촛불을 켜두고 미친듯이 일기를 적어내려 갔다. 상상 속 동물과 마주한 학자처럼, 다시 못올 그 순간을 보존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써내려갈 때마다, 맨 앞에서 기타를 들고 걷던 K형의 모습과 노래의 선율, 스페인 사람들의 표정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나는 그 속에 스스로의 모습을 덧칠해보았다. 


 입대하고 취미생활의 자유가 보장되었을 때 곧장 기타를 들여왔다. 당시 'Officially Missing you', ''I'm Yours' 등의 노래가 유행했으나 내 픽은 오로지 김광석의 '일어나'였다. 반주가 손에 익어갈수록, 또다른 여행에 대한 열망이 익어갔다. 


2015년 1월

 

 노래를 완전히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전역 직후 다시 한 번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이어지는 6개월 간의 여정이었다. 기타와 노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인연과 기억을 만들어주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잠자리부터 먹거리까지 현지인들이 베푼 친절에 작은 보답이 되기도 했다. 구상하던 그림을 그대로 그려낸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어딜가든 의외로 쉽게 기타를 구할 수 있었다.


2024년 1월


 그리고 10년, 자잘한 성공과 큰 좌절이 여러 번 있었다. 특히 작년은 유독 힘든 시간이었다. 다 그린 그림에 먹물을 몇 번 쏟아보니 구상보다 덧칠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되었다. 그 역시 삶의 방식이지만, 그 시절의 글을 읽으면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몰려온다. 

 기타를 “계속” 배우고 있는 것은, 가지고 있던 것 중 먹물이 튀지 않은 몇 안 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밑그림 그대로 그려도 좋고, 덧칠을 해도 좋으니 다시 한 번 그리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 김광석 – “일어나”

https://www.youtube.com/watch?v=MrDdP6P5zgg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