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 인간, 프롤로그 | 새벽 2시, 커서는 깜빡이고

나의 부족함조차 데이터가 되어버린 밤에 대하여

by 닥터 F

2025년 서울의 밤은 고요하지 않다. 단지 소음이 없을 뿐이다. 창밖으로는 밤샘 배송을 알리는 트럭들의 희미한 전조등만이 도로를 훑고 지나간다. 나는 여의도 사무실의 책상 앞에 앉아,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 너머로 27인치 모니터 속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응시하고 있다 .


커서는 마치 내게 "데이터를 입력하시오, 이 느려터진 입력 장치야"라고 재촉하는 디지털 심장박동처럼 보인다.


나는 지난 세 시간 동안 단 한 문장도 완성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실존'이라든가 '소외', '불안' 같은 단어들이 부유했지만, 그것들을 엮어 문장으로 내뱉으려 할 때마다 턱턱 막혔다. 문장은 뚝뚝 끊겼고, 조사는 어색했으며, 논리는 비약되었다. 그것은 명백한 실패였다.


결국 나는 굴복했다. 습관처럼 생성형 AI의 프롬프트 창을 띄웠다. 그리고 자조 섞인 문장을 입력했다. "현대 서울을 살아가는 지식 노동자의 고독과 권태에 대한 에세이 도입부를 작성해 줘. 문체는 건조하게, 김승옥 스타일로."


엔터키를 누르는 소리가 채 방 안의 공기에 스며들기도 전이었다. 정확히 3초. 화면에는 내가 세 시간 동안 끙끙대며 뱉어내지 못한 완벽한 문단이 스트리밍 되듯 출력되었다.


"2025년의 서울은 거대한 서버실과 같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슬롯에 꽂힌 채 열을 식히고 있는 부품일지도 모른다. (중략) 이 도시에서 고독은 시스템 오류가 아니라, 최적화된 기본 설정값이다."


매끄러웠다. 징그러울 정도로 유려했다. 비문은커녕, 내가 의도했던 감정의 질감, 그 '도시적 감수성'까지 정확히 구현되어 있었다 . 오타도, 주저함도, 고뇌의 흔적도 없는 텍스트. 그것은 마치 반도체 공장에서 막 깎아낸 웨이퍼처럼 차갑고 완벽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AI가 뱉어낸 그 문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내가 쓰다 만 메모장 속의 문장들을 보았다. '나는... 외롭다. 아니, 피곤한 건가? 넷플릭스나 볼까.'


초라했다. 나의 문장은 울퉁불퉁했고, 촌스러웠으며, 무엇보다 비효율적이었다. 나는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내가 쓴 문장들을 드래그했다. 그리고 주저 없이 'Delete' 키를 눌렀다. 백지 위로 나의 지지부진했던 세 시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순간, 기묘한 패배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단순히 글쓰기 실력의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인간적 부족함'이 더 이상 낭만이 아닌, 제거되어야 할 '데이터 노이즈'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각성이었다 .

과거의 작가들에게 창작의 고통은 훈장과도 같았다. 밤을 새워 고뇌하고,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지는 행위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하지만 2025년의 서울에서 나의 고뇌는 그저 '생산성 저하'일 뿐이다. 나의 머뭇거림, 나의 실수, 나의 빈약한 어휘는 더 이상 개성이 아니다. 그것은 최적화되지 않은 데이터, 즉 오류(Error)다.


AI는 결코 머뭇거리지 않는다. 밤새워 담배를 피우지도, 이번달 대출 원리금을 걱정하며 한숨을 쉬지도 않는다. 그저 확률적으로 가장 적절한 단어를 배열할 뿐이다. 그 매끄러운 알고리즘의 세계 앞에서, 나의 불완전한 육체와 정신은 고장 난 시계처럼 덜컹거린다 .


나는 AI가 써준 완벽한 문장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Ctrl+C, Ctrl+V'. 그 두 번의 손가락질이면 나는 유능한 작가로 포장될 수 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독자들은 매끄러운 문장에 '좋아요'를 누를 것이고, 나는 안도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백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이번엔 AI가 써준 문장을 지웠다. 커서는 다시 텅 빈 화면 위에서, 길 잃은 아이처럼 깜빡였다 .


나는 다시 쓰기로 했다. 울퉁불퉁하고, 비문이 섞이고, 세련되지 못한 문장을. 가장 효율적인 정답을 3초 만에 얻을 수 있는 시대에, 굳이 세 시간을 들여 오답을 적어 내려가는 미련함.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데이터 덩어리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유일한 증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이 책은 그 미련함에 대한 기록이다. 매끄러운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기꺼이 고장 나기로 결심한 한 '오류 인간'의 투박한 일지다 .


새벽 2시 15분. 나는 다시 자판 위에 손을 올린다. 나의 부족함이, 나의 오타가, 나의 실패가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


커서는 여전히 깜빡인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재촉이 아니라, 나의 다음 실수를 기다려주는 눈빛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이전글Q&A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건 컨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