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방황

by 성열호

성실한 방황

요즘 '조용한 은퇴'라는 말이 유행이다.

회사 다니면서 딱 월급 받을 만큼만 일한다는 거다. 열정? 그런 거 없다. 승진? 관심 없다. 야근? 안 한다. 출근해서 할 일 하고 칼퇴하고 내 삶을 산다.

20-40대 등 아직 은퇴가 먼 세대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는데, 솔직히 이해가 된다. 열심히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회사는 내 인생 책임 안 져준다.

근데 나는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다. 나는 '조용히' 은퇴한 게 아니라 '시끄럽게' 방황 중이다.

몇 년 전부터 가끔 질문을 받는다.

"앞으로 계획이 뭐예요?"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다른 데로 갈 생각은 없어요?"
"비전이 뭐예요?"
"왜 이 일 해요?"

회사에서도 묻고, 지인들도 묻고, 가끔 나 자신도 묻는다. 대답은 항상 비슷하다.

"글쎄요... 아직 생각 중이에요."

몇 년째 생각 중이다. 생각이 너무 길다.

비전이 뭐냐고? 그런 거 없다. 진심으로 모르겠다.

5년 뒤 10년 뒤를 생각해 보라고? 뭐 하고 싶냐고? P입니다. 5일 뒤도 모르겠는데 5년은 무슨. 솔직히 다음 달 계획도 확실한 게 없다.

다른 이들은 다 저런 걸 생각하고 사나 신기하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이런 식으로 살았다.

해보고 싶으면 해 본다. 안 되면 말고. 잘 되면 좋고.

소진되면 쉬고. 흥미 없으면 미루고.

그러다 보니 벌려놓은 일이 꽤 많다. 동호회나 모임도 이것저것 맡고, 프로젝트도 여기저기 참여하고, 새로운 거 한다고 하면 "저도 끼워주세요" 했다.

겉으로 보면 뭔가 열심히 사는 것 같다.

"와, 바쁘시네요." "하시는 게 많으시네요." 이런 말 종종 듣는다.

근데 속을 들여다보면 텅 비어 있는 것만 같다. 이것저것 했는데 딱히 내세울 게 없다. 뭐 하나 제대로 파본 것이 없다. 즉 전문성이 없는 것 같다.

전문성이라는 게 뭔가를 깊이 파서 날카로워지는 거란 생각이 든다. 이 분야에서는 내가 전문가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

근데 나는? 뭉뚝하다. 연필로 치면 한 번도 안 깎은 새 연필 같다. 아니, 그건 좀 아닌 거 같고. 가방 속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 심이 부러진 연필에 가깝지 않나 싶다.

이것도 좀 알고 저것도 좀 안다. 근데 '좀' 아는 거다. 깊이가 없다. 얕은 지식을 넓게 펼쳐놓은 느낌. 뷔페식당 음식 같다고 할까. 종류는 많은데 맛집은 아닌.(사실 보면 종류도 별로 없다)

가끔 불안하다.

주변을 보면 다들 뭔가 있다. 누구는 그 분야 10년 차고, 누구는 자격증이 주렁주렁이고, 누구는 책도 내고 강의도 한다.
나는? "그래서 너 전문 분야가 뭔데?"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음... 잡학...? 그건 전문성이라고 안 쳐주더라.

후배들이 들어오면 더 불안하다. 그러니까 이 분들한테 알려주면서 일을 해야 한다는 거죠? 나도 모르는데...?

나는 대체 뭘 한 거지? 나이만 먹은 건가?

근데 또 생각해 보면 날카로운 사람들이 전부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한 우물만 파다가 그 우물이 마르면 어떡하나.

요즘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데. 10년 판 전문성이 하루아침에 쓸모없어지기도 한다. AI가 문제다. 그렇다고 10년 뒤를 예측하고 파기엔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면 나처럼 이것저것 찔러본 사람이 오히려 유연한 거 아닌가? 적응력이 있는 거 아닌가?... 아닌가. 모르겠다. 그냥 내가 위안 삼으려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사람들이 나한테 진로를 물을 때마다 좀 미안하다.

뭔가 내가 생각한 게 있겠거니 기대하는 눈빛인데, 줄 게 없다. "저도 아직 찾는 중이에요." 이 말을 20대에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지금 나이에 하려니까 좀 철이 없나 싶다.

근데 어쩌겠나. 모르는 걸 아는 척할 수도 없고. 없는 비전을 만들어낼 수도 없고. 그냥 솔직하게 방황 중이라고 말하는 수밖에.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성실하게 방황 중입니다."

방황은 하는데 나름 열심히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건 아니다. 이것저것 해보면서 나한테 맞는 걸 찾고 있다. 아직 못 찾았을 뿐.

뭉뚝한 연필도 쓸 데가 있겠지. 날카로운 펜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굵직하게 밑그림 그릴 때는 뭉뚝한 게 나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랬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방향이 보이겠지. 아니면 방황 자체가 내 길이 되든가.

...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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