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폰을 바꿨다.
아이폰 8 레드 폰이었는데, 언제 산 건지 찾아보니 2018년 4월에 샀던 폰이다. 10년은 채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마지막 몇 달은 처참했다. 아침에 100% 충전해서 나가면 점심때 50%, 퇴근할 때 20%, 집 도착하면 5%.
대체 뭘 했다고. 카톡 좀 하고 뉴스 좀 봤을 뿐인데...
새 폰 샀더니 하루 종일 써도 60%가 남더라. 아, 이게 폰이구나. 그동안 내가 쓰던 건 뭐였지.
근데 웃긴 게, 그 낡은 폰이 나랑 닮았다.
대학생 때는 밤새 술 마시고 다음 날 9시 수업도 멀쩡했다. 주말에 여행 갔다가 새벽 기차로 올라와서 월요일 바로 수업을 듣고 동아리 행사에 참여해도 괜찮았다. 피곤하면 커피 한 잔, 하루 푹 자면 완충. 강철체력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완충 안 되는 배터리 같다. 하루 무리하면 이틀 앓아눕는다.
야근한 다음 날은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 커피를 세 잔을 마셔도 눈만 떠 있고 뇌는 오프라인이다. 사무실 책상 한편엔 약과 영양제가 종류별로 있다. 홍삼을 달고 산다. 10대 20대 때는 부모님이 먹으라고 쥐어줘도 안 먹던 것이다.
충전 속도도 느려졌다.
예전엔 주말에 하루 자면 월요일에 새 사람이었다. 지금은 주말 이틀을 통째로 누워있어도 월요일 아침에 겨우 일어난다. 그것도 아무 일정 없이 진짜 아무것도 안 했을 때 이야기다. 약속이라도 하나 있으면 충전은 무슨, 오히려 방전된다.
휴가는 더하다. 일주일 쉬면 이틀은 쉬는 것에 적응하느라 보내고, 사흘쯤 되어야 좀 쉬어지고, 나머지 이틀은 복귀 걱정에 불안하다. 순수하게 충전되는 시간은 고작 이틀. 이게 휴가인지 손익분기점 계산인지 모르겠다.
약속 잡을 때도 체력을 계산하게 됐다.
금요일 저녁? 괜찮다, 다음 날 쉬니까. 수요일 저녁? 좀 힘든데. 목요일? 안 된다, 금요일까지 버텨야 해. 달력 보면서 에너지 예산을 짠다. 이번 주 사회적 배터리 용량은 여기까지입니다.
예전엔 퇴근하고 친구 만날 에너지가 남았다. 지금은 퇴근하면 끝이다. 집에 가서 누울 거다. 누워서 폰 보다가 잘 거다. "오늘 저녁에 뭐 할까?" 이런 질문 자체가 사치다.
발열도 심해졌다.
낡은 폰은 조금만 무리해도 뜨거워진다. 나도 그렇다. 요즘은 조금만 스트레스받으면 머리가 뜨겁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열이 난다. 긴장하면 목이 뻣뻣해지고, 화나면 관자놀이가 뛰면서 두통이 온다.
젊었을 때는 감정도 체력으로 버텼다. 짜증 나도 참을 힘이 있었다. 지금은 방지턱이 없다. 예전엔 웃어넘겼을 일에 짜증이 나고, 별일 아닌 것에 눈물이 난다. 폰도 낡으면 렉 걸리더니, 나도 낡으니까 감정에 렉이 걸린다.
새 폰 사듯이 몸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최신 모델로. 배터리 용량 2배, 충전 속도 3배, 발열 제로. 쿠팡 새벽 배송 되면 좋겠는데. 안 되니까 이 낡은 몸으로 계속 가야 한다. 고장 난 폰을 10년도 쓰지 못하는데 고장 난 몸으로 100세 인생을 어찌 살지 고민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관리뿐이다. 폰도 배터리 아끼려면 밝기 낮추고 백그라운드 앱 끄지 않는가. 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무리하지 않기. 에너지 새는 곳 줄이기. 쓸데없는 데 힘 빼지 않기.
제일 서글픈 건,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어느 날 갑자기 낡은 게 아니다. 서서히, 조금씩, 용량이 줄었다. 처음엔 못 느꼈다. 그냥 오늘 좀 피곤한가 보다 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 이게 피곤한 게 아니라 그냥 이게 나의 기본값이 된 거구나.
새 폰이었을 때가 기억난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때. 에너지가 넘쳐서 가만히 있기 힘들었던 때.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가 모자란다.
그래도 낡은 폰이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7년 쓴 폰에는 7년의 기억이 있다. 사진도, 메시지도, 내 습관대로 배치된 앱들도. 새 폰은 빠르고 좋은데 어딘가 어색하다.
낡은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빨리 달리진 못하지만 그만큼 쌓인 게 있다. 체력은 줄었지만 뭐가 중요한지는 좀 더 안다. 에너지가 적으니까 아무 데나 쓸 수가 없다. 골라 써야 한다.
...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오늘도 퇴근하니까 배터리 15%다. 폰 말고, 나.
집 가는 길에 마트 들러야 하는데 눈도 오겠다 그럴 힘이 없다. 내일 사지 뭐. 낡은 폰은 이렇게 사는 거다. 할 수 있는 것만 두어 개 하고, 나머지는 내일로 미루고. 완충은 포기한 지 오래다. 방전 안 되게 버티는 거다.
오늘도 버텼다.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