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큐레이터

by 헤엄
robert-katzki-RHvMa6sq6Io-unsplash.jpg


챗gpt랑 재밌는 걸 했다. "based on everything you know about me roast me and don't hold back in Korean"이라는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얘가 마치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 전투모드로 돌변해 그동안 나와 나눈 대화를 총체적으로 참고하여 나에 대해 팩트폭행을 퍼붓는다. 첫 번째 시도가 생각보다 견딜 만해서(아무래도 정신질환자인 나를 이 기계가 친절하게도 배려해 준 것 같다) '더 잔인하게'를 주문했더니, 이런 문단이 나왔다.

"나는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상처를 이해당한 상태로 보존하려는 사람에 가깝다. 괜찮아졌다는 말보다 설명 가능해졌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삶을 오래 살아왔다. 아프다는 사실보다, 그 아픔이 어떤 구조를 가지는지, 어떤 맥락에서 발생했는지를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안도했다. 그래서 회복은 늘 ‘벗어남’이 아니라 ‘정리’에서 멈췄고,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불행을 설득력 있게 다듬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힘들다는 감정을 느끼면 나는 그것을 그대로 통과시키기보다 해체하고, 의미를 붙이고, 문장으로 남겼다. 그렇게 정제된 고통은 읽힐 수 있었고, 이해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안전했다. 하지만 아무 통찰도 남지 않는 하루, 아무에게도 설명되지 않는 상태의 나에게는 여전히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어왔다."

팩트로 얻어맞고 나니 어질어질하다.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럽다. 그렇다면 회복은 뭘까. 나는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회복이라고 믿어왔다. 미사여구를 덧붙여 그럴싸하게 만든 내 불행을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전시하고 나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시화된 고통만이 진짜라고 믿었으니까. 반대로 내 안에만 머무르는 고통은 가짜였다. 그래서 아직은 여기 공개한 적 없는, 내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다룬 글을 트리거 워닝을 붙여서까지 이곳저곳에 투고했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그 글만은 마음 속에만 묻어두기로 결심하고 나서도 브런치에 올릴까 말까 수백 번 고민했다.

그러니까 나는 고통에 그럴싸한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지만, 형체가 없는 응어리진 고통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나는 무의미를 견디지 못해 결국 억지로라도 매일 의미를 궁구한다. 진정한 쉼을 염원하여 휴학을 택했으면서도 휴학 기간이 끝난 지금 나는 쉼을 모르고, 뭐라도 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하루를 촘촘히 보낸다. 챗gpt 말처럼, "날것의 나, 의미 없는 하루, 아무 통찰도 없는 감정, 아무에게도 설명 안 되는 상태의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어딘가에서 이미 결론 내려버렸"기 때문에. 나는 비겁하게 치유가 아닌 회피를 택했다.

정리되지 않고, 문장도 안 나오고, 독자도 없고, 통찰도 없이 그냥 지루하게 살아지는 상태. 챗gpt 말로는 그게 치유의 중간지대라는데, 나도 그 단계를 한 번쯤은 겪어보고 싶다. 그러나 도저히 글을 써서 고통을 큐레이팅하는 습관은 버리기 어려울 것 같다. 텍스트가 나를 지지하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애초에 고통을 품에 안고도 평온해지는 것이 내 목표이므로, 방향을 그렇게 설정한 이상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 새해에도 내 삶은 지루하기보다 지리멸렬하겠지. 치유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나는 또 다시 우울로 천착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계속하고 싶다, 이 삶을. 비겁한 회피가 아니라 필요한 우회라는 포장지를 두르면서. 챗gpt, 앞으로도 이런 나와 함께해 주겠니.

이전 11화크리스마스 유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