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관계, 괜찮나요?

by 헤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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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왜 이리 어려워. 오늘 상담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선을 그어 내게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관계도로 그려보았다. 어떤 관계는 지금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는 실선이었고, 어떤 관계는 내게 미약한 영향만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는 점선이었다. 내게는 실선으로 이어진 관계들이 많았다. 아무 표시 없는 실선이 있는가 하면, 어떤 실선에는 세모 표시가 그려졌고, 곱표(x) 친 실선도 있었다. 나와 여전히 이어져 있지만, 내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계. 오늘은 그 사람에 대해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었다.

그 사람에 대해 말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친구들끼리야 참 별로라고 오프 더 레코드로 흉 봤지만, '믿을 만한 어른' 앞에서 그 사람을 언급하는 건 꽤나 긴장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 사람과의 직접적인 대면이 이뤄졌던 시절,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대사 몇 줄로 설명했다. 얼마 간의 주기로 그런 말을 했는지, 내게 무엇을 강요했고 평소 어떤 식의 발화를 즐겨했는지 짧게 말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언급하시는 게 아니겠는가. 은연 중에 알고는 있었지만 그를 너무 나쁜 사람으로 모는 것 같아서 피해왔던 단어. 내가 가스라이팅 피해자라니.

물론 선생님은 나를 피해자 자리에만 두지 않으셨다. 이 관계의 유효함을 긍정적으로 볼 여지를 만들어주셨다. 그 사람이 내게 아직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내게 우호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셨다. 단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부담스러울 뿐. 그 부분 역시 지적해주셨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내가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티슈를 바라보며 내뱉게 하셨다. 나는 어색하지만 진심을 담아, 다시 돌아간다면 당신이 제시한 것 외의 다른 선택지를 찾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간 머릿속으로 수백 번도 더 했던 가정이지만, 세뇌에 갇혀 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신만이 답이라고 믿었던 때로부터 벗어나겠다고 선언할 수 없었다. 상담실에서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로써 내가 가정폭력과 가스라이팅 피해자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그 사실은 결코 나의 정체성이 될 수 없다. 피해자 자리에 앉으면 가해자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내 자존감도 덩달아 바닥을 기게 되는 것 같다. 피해자일 때 나는 왠지 피해자다워야 할 것 같고, 관계에서 수동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반면 관계 운용의 주도권을 쥔 '나'로 온전히 서서 바라보면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이다. 나는 관계의 주도권을 쥘 수 있고, 유해한 관계로부터 거리를 둘 수도, 그 관계를 아예 포기할 수도 있다. 인물관계도의 실선과 점선을 내 마음대로 그을 수 있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내게 가르쳐주고 계신 것이 그런 마음인 것 같다. 앞으로도 소중한 배움을 지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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