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것도 없는데 번아웃이 왔다. 뭔갈 해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할 힘이 나지 않는다. 지난 주에 한 일이라곤 상담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교양서 절반 읽기와 개론서 수준의 국문 논문 한 편 읽기. 적어놓고 보면 뭘 많이 한 것 같지만 이 일들에 순수하게 투자한 시간은 세 시간이 조금 넘는다. 일주일에 세 시간, 그마저도 버거워하는 내 모습이 마냥 미웠다. 시선은 또 손목을 향했고, 애꿎은 손목만 손톱으로 꾹꾹 눌러 아프게 했다. 손목이 따가운 동안에는 나를 둘러싼 죄책감이랄까 내가 나를 벗어나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내가 나를 해하는 행위에 중독되곤 하는 이유다.
오늘 상담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까 했는데, 사담을 하다가 40분이 날아가 버렸다. 선생님과 깔깔 웃고 나니 참 오랜만에 이렇게 웃어보는 것 같아 좋기는 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선생님은 요즘 마음이 어떠냐고 슬쩍 물어보셨다. 나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마음이라고 답했다. 다시 자살시도를 하던 예전으로 돌아갈까 봐 두렵고, 힘을 내야만 하는데 힘이 나지 않는 상황에 지쳐 있다고. 이은 질문은 지난 시간에 다뤘던 주제들 중 어떤 것이 기억에 남느냐는 거였다. 자해를 통해 나를 벌주는 것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 문장을 늘 마음에 두고는 있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지난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어린 시절의 엄마가 나를 대하듯, 내가 나를 대하고 있다는 말씀도 하셨었다. 이번에는 나를 아프게 하는 엄마의 말 대신에 내 마음 속에 세워놓아야 할 지침들을 만들어보았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으니 힘들 땐 충분히 쉬어도 된다는 것, 그리고 나의 속사정과 긍정적인 면까지 헤아려주어야 한다는 것. 전자는 내가, 후자는 선생님이 꼽았다.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만 아니까. 힘을 내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수백 번 고민하고 도전하지만 힘들어서 포기하게 되는 삶 또한 용기 있고 가치롭다. 마침내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 나에게,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는 허가서를 작성해 주었다. 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렵지만 그래도 방법을 찾아 봐야지.
여기서 마무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자해 충동이 남았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뜬금 없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뭐냐고 물어보시는 거였다. 나는 한교동을 좋아한다. (교동이♡) 교동이 키링을 손에 쥐고, 교동이에게 나 요즘 자해 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나 남들은 100을 척척 하는데 나는 겨우 20을 하고 힘들어하는 게 죽을 만큼 싫다고. 그리고 내가 교동이가 되어서 내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했다. 나는 네가 안전하고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고, 스스로를 아프게 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집에 있는 더 푹신푹신하고 안을 수 있는 교동이 인형으로 자해 충동이 들 때마다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우리 집 교동이들을 모조리 안아줘야겠다.
마지막엔 선생님과 새끼손가락을 걸어 자해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나왔다. 약속을 지킨 내담자가 될 수 있을까. 상담실 바깥은 춥고 나는 몸을 움츠리며 손을 호주머니에 넣는다. 거리에는 녹지 않은 눈이 까맣게 엉겨 있다. 순간 내 처지가 골칫덩어리 눈 같아서, 몸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그제서야 내가 요즘 우울하구나, 를 깨닫는다. 자해 충동을 느끼면서도, 이 삶에서 이탈하고 싶어하면서도 내가 우울하다는 자각이 없었다. 오늘 상담을 마치고 나서야 내가 다시 한번 지난한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인정한다. 부디 이 시기를 잘 넘길 수 있기를 바란다. 지쳐 누워있는 상태로부터 서서히 일어나 다시 바로 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