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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하 Aug 24. 2018

무언가를 꼭 정리해야 할까?

여행을 다녀온 후 나에게
'여행 어땠어?'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는 날들을 보냈다.

다녀온 곳이 한두 군데 여야 한 문장에서 두 문장 정도로 정리가 될까 말까 한데, 내가 2주 동안 미국에서 다녀온 도시는 7~8곳 정도가 되었고, 그때의 느낌과 그때의 생각을 여행이 끝난 지금 천천히 곱씹는 것도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런데 여행을 정리하기 전에 이미 나는 어떤 도시의 명소보다 여행 중에 생긴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이 훨씬 기억에 오래, 그리고 진하게 남는 걸 알았다. 그건 평소처럼 사진기를 꺼내고 여유 있게 우뚝 서 있는 무언가를 찍을 수 있어서 사진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리되지 않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른 생각과 감정이 엉켜있는 것과 같았다.


그 엉켜있는 생각의 줄을 푸는 것은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지금까지 가만히 두고 있다. 정리해야 한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천천히 곱씹어보면서 정리하면 될 것이다. 지금은 여행에 다녀와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태를 조금 더 즐길 것이다.

어떤 작가가 자신의 예전 글을 보면
얼굴이 달아오르며 부끄러워진다고 했다.
 '왜 글을 이렇게 썼지?'와
'더 잘 쓸 수 있었는데'
또는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와 같은 후회와 함께.

작가와 같이 예전의 내가 했던 모든 생각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나, 지금 생각을 정리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인가, 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때가 철부지 같아도 그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때의 그 과정을 거치고 거쳤기에 그때와 샌드위치처럼 겹치지만 조금은 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무언가를 꼭 정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정리하지 않아도, 그때의 그 생각과 느낌은 그 자리에 있다. 그렇지만 정리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아예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작가가 과거의 자신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분명 모든 순간들은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고, 기록하지 않더라도 그대로 기억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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