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지하철은 처음 타는 사람에게 그야말로 지옥철이다. 뉴욕에서 우리나라의 지하철이 얼마나 편하고 잘 되어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는데,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할 때마다 마치 '뉴욕의 지하철'이라는 신문물을 접하는 기분이었다. 결국엔 겨우 적응되었다 싶을 때 다른 여행지로 이동하면서 뉴욕을 떠나게 되었지만, 뉴욕의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에 적응하는데 자그마치 5일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여행 전에 많은 것을 준비한 것 같았지만, 막상 진짜 뉴욕에 가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지하철이었는데, 꽤 많은 조사를 하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철 매표소 앞에서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리고 나는 앞장섰지만 그 새하얘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나는 의외로 근거 없는 큰 소리를 많이 쳤다.
이 쪽 길로 가야 해! (사실 본인도 잘 모르겠음)
한 손에 구글 지도가 있으니, 처음 가보는 도시를 잘도 돌아다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스스로 길을 잘 찾는다고 생각했던 나는 객관적인 지도가 아니라 감, 그러니까 '촉'에 의존해서 길을 찾을 때가 꽤 있었다. 그렇게 촉에 의해 길을 가다 보면 원래 경로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목적지와 아예 반대편으로 갈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엄마와 함께 지하철을 탈 때였다.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가기 위해 맨해튼의 남쪽 방향으로 가야 했던 엄마와 나는 우선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입장을 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양 쪽 방향이 반대인 곳에서 어디로 가는 지하철을 타야 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에 나온 지하철 역명의 방향(우리나라로 치면 왕십리행, 수원행 같은 것)이 실제 역에 있는 것과 달랐다.
사실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여기에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맞는 거냐'라고 물어보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은 두 갈래 길 중에서 망설임 없이 방향을 선택해서 가는데, 왜 나는 지도를 봐도 아무것도 모르겠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역에서 한동안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혼자 끙끙대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만큼은 촉이 아니라 뉴욕 주민들이 우리 빼고 다 아는 근거를 찾고 싶었다.
오랜 시간 끙끙대면서 찾은 근거는 바로 '몇'번가로 지하철이 가는지에 따라 지하철의 방향이 나뉜다는 것이었다. 맨해튼은 세로로 긴 지형인 데다가 지하철 노선에서 uptown과 downtown의 구분이 명확했다. 예를 들어서 뉴욕현대미술관(53번가)에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34번가)으로 가기 위해서는 번가 수가 낮아지므로(53번가☞34번가) 'downtown'행을 타면 되는 것(up/downtown 단어가 없을 경우, 내가 타려고 하는 지하철의 방향이 번가 수가 높아지는지 또는 낮아지는지를 보고 구분할 수 있다)이었다. 이 원리를 알고 나서는 구글 지도로 방향을 검색할 필요도 없이 두 갈래 길에서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 내가 가는 방향에 대해서 구체적인 근거를 찾는 경험을 하니, 예전에 감과 촉으로 길을 잘 찾았던 때와는 다른 쾌감이 들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촉을 신뢰하되 객관적인 근거를 하나 이상 가질 수 있을 때 촉을 믿자는 것이었다. 조금 극단적인 하나의 예이지만, 예전에 어떤 미국의 조종사가 자신의 비행기가 추락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비행기가 추락한다는 교신을 듣고 나서도 추락하지 않는다고 믿다가 태평양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태어나서 처음 가 보는 도시라고 해도,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얼마나 다르겠어?'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고, 뉴욕 여행 중의 나는 많이 앞장서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곳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뉴욕의 문화에 적응하느라 시간을 많이 보낸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근거 있는 촉을 믿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했다. 익숙한 것(지하철)과 익숙하지 않은 것(뉴욕의 지하철)의 조화는 여행을 고무줄처럼 탄력 있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탄력이 나는 지금 꽤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