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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하 Sep 30. 2017

의미로 가득 찬 무의미함


고양이 감정의 쓸모 , 이병률


1

조금만 천천히 늙어가자 하였잖아요 그러기 위해 발걸음도 늦추자 하였어요 허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질 않아 등뼈에는 흰 꽃을 피워야 하고 지고 마는 그 흰 꽃을 지켜보아야 하는 무렵도 와요 다음번엔 태어나도 먼지를 좀 덜 일으키자 해요 모든 것을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한번 스친 손끝

당신은 가지를 입에 물고 나는 새

요 햇빛의 경계를 허물더라도

나는 제자리에서만 당신 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하나의 무의미에요 

나는 새를 보며 놓치지 않으려 몸 달아하고 새가 어디까지 가는지 그토록 마음이 쓰여요 새는 며칠째 무의미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에 가지를 날라놓고 가지는 보란 듯이 쌓여 무의미의 마을을 이루어요 내 바깥의 주인이 돼버린 당신이 무의미를 밀봉한 주머니를 물어다 종소리를 만들어요 내가 듣지 못하게 아무도 없는 종소리를 


2

한 서점 직원이 한 시인을 사랑하였다

그에게 밥을 지어 곯은 배를 채워주고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살아지겠다 싶었다

바닷가 마을 그의 집을 찾아가 잠긴 문을 꿈처럼 가만히 두드리기도 하였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이를 문장으로 문장으로 스치다가도 눈물이 나 그가 아니면 안 되겠다 하였다

사랑하였다

무의미였다




초점 또렷한 고양이의 눈을 바라본 적이 있는지? 고양이를 한번이라도 마주쳐봤다면, 그 눈이 담은 무심함과 관심의 중간을 느꼈을 것이다.


초점 또렷한 고양이의 눈을 바라본 적이 있는지? 고양이를 키우거나, 심지어 길거리의 도둑고양이를 한번이라도 마주친 사람이라면, 그 눈이 담고 있는 무심함과 관심의 중간의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고양이를 마주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참 흔한 일이면서도, 사람이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과는 다른 신선함을 마주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한 고양이의 감정을 누군가가 갖게 되었다면, 그 감정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지극한 관심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과 관련 없는 한 존재를 그저 응시하는 무의미일까?


 1연에서 시인은 고양이로서 누군가에게 속삭인다. 뒤돌아 볼 틈조차 갖지 않은 그 ‘누군가’에게, 다음 생에는 보통의 삶을 살리라고 다짐한다. ‘발걸음’을 늦추지 못한, ‘흰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보는 무렵’ 쯤을 지나는 시인은, 이미 지나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기보다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를 타이른다. 하지만 ‘그’는 가지를 입에 물고 나르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가지는 쌓이고 쌓이는 것을 반복하며, ‘그’의 열망을 충족시켜주지만, ‘그’가 바라보는 ‘새’와 ‘새의 가지’는 하나의 무의미를 이룬다. 


 ‘가지를 쌓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떠나서, ‘그’에게 가지를 쌓는 행위는 다음 생에 새(鳥)로써 태어나는 것을 ‘무의미의 삶’이라고 가정할 정도로 의미 없는 것이다. ‘무의미의 종소리’를 만드는 ‘새’에게 ‘그’는 그 소리를 자신이 듣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가 바란 것은 종소리를 만드는 것이 아닌, 다시 새로서 태어난다는 언질을, 지금의 ‘새’가 받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가 바라볼 때, ‘새’의 종소리는 무의미의 집합이며, 그 종소리를 만들게 될 다음 생의 ‘새’는 지금이 지나면 다가올 자신의 미래모습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가지 쌓는 것이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멈출 수 없어 끝내 ‘무의미의 마을’을 이루는 것이다. 


무관심과 관심, 무의미함과 의미있는 것. 고양이는 그 중간의 시선을 즐기며 그를 우리에게 보내온다.


 무의미로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이 비롯할 수 있다면, 혹은 반대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무의미하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지로 집을 짓는 새를 바라보는 고양이의 감정과 비슷한 맥락의 것이다. 무의미한 사랑이 아닌, ‘무관심’, 즉 아무 의미 없는 한 감정으로부터 갑자기 생겨버린 ‘사랑’ 이며, 왜 생겨났는지 그 출처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씻어 내리기 힘든 감정 말이다.


 헌신적인 사랑과 무의미로부터 비롯한 사랑의 차이는 그 사랑의 대상이 지금 옆에 자리하고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 일 것이다. 좋은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사랑하는 이에게 해줄 수 있는지, 없는지. 자신의 마음을 사랑하는 이에게 표현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것인데, 이 두 질문에 ‘없다’ 고 답변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이다. ‘그’는 ‘새’가 가지를 물고 나르는 무의미의 반복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계속 지켜보려고, 놓치지 않으려고 몸 달아한다. 즉, ‘그’로 표현되는 시인 자신, 또는 시인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고양이 같은 감정으로 ‘새’를 무의미의 종소리를 만드는 동물로 바라보고 있지만, 실제로 ‘그’도 하나의 무의미로부터 비롯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2연에 나오는 ‘서점직원’ 또한, ‘서점’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문장과 글로써 만난 시인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문장과 글이라는 벽으로 막혀있을 뿐,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인을 사랑, 어쩌면 동경하는 것이기에 ‘무의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무의미로부터 비롯한 사랑은 ‘제자리에서만 당신 위를 가로질러 나아가는 것’과 같이 적극적이지 못한 방법을 동반하며, 이는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를 상대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들키고 싶지 않은 소극적인 감정이다. 사랑하는 이를 정면으로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면서도, ‘무의미’로부터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는 것에 마음이 쓰이는 어중간한 경계선상의 감정.  ‘그’와 ‘손 끝’을 한 번 스치는 어색함과 ‘햇빛’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용기가 있어도, 이 모든 것은 ‘무의미’로부터 비롯했기에, ‘고양이’다운 보통의 감정, 그러니까 ‘무의미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통해 소통하는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무의미한 것이 의미가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이렇게 사랑에 관한 것일 것이다. 모든 행동, 모든 사소한 것 하나, 하나의 의미를 찾지 못해 무의미하지만, 그 무의미로부터 혼자 하는 사랑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역설적인 사랑을 시인은 고양이의 시선에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늘 사랑하면서 ‘무의미’로부터 ‘의미’를 찾고, 그 ‘의미’가 ‘무의미함’을 깨닫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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