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의 <비망록>을 읽고
햇볕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 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은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 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 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가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유잣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거짓을 겨루었어도 좋았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누구에게나 기억에 특별하게 남아있는 자신의 일부분이 있다.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었던 특별한 추억과 기억, 생각이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기억을 글로 써내려갔다면, 그리고 그 글을 시간이 지난 후에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나이테가 한 나무의 일생 동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시인의 운명 또한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평생을 같이하는 것이 운명이라면, 그에 대한 기억을 우리는 어딘가에 적지 않는가. 그 나이, 그 순간, 그 날에 할 수 있었던 생각들만이 시인의 삶의 부분을 이루고 전체를 만들며, 한편으로는 시인의 지난날들을 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리고 그 통로가 되는 것이 바로, 비망록이다.
아직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 인생에서의 최고 난제(難題)는 바로 사람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시인은 운명을 무시해보고, 그에 환호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시에서 ‘거만한 술래’로 비유된 신(神)은 야속하다. 신이 ‘술래잡기’라는 놀이가 이루어지는 하나의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시인의 운명, 그리고 비망록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의 거만함을 허락하며 숨어 있는 것을 자신의 모습을 비망록에 적기에는 너무 허망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운명을 찾으려고 노력해도, 돌아오는 것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이유 없는 상처이기에, 시인은 늘 운명을 알고 싶어 하며 그를 고달파하면서도 결국에는 혼자가 될 뿐이다.
시인을 비롯한 사람의 삶에서 이십대,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책들은 수도 없이 세상에 넘쳐난다. 이전까지는 몰랐던 것들을 한 순간에 알게 되면서 바뀌는 시선, 색안경, 그리고 ‘운명’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기록들…… 시인은 삶의 연속선상에서 너무도 빨리 바뀌게 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게 느낀다. 그 때 펼치게 되는 것은 아마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적어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을 적는 비망록일 것이다. 사람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쪽 귀로 흘려버리고, 비망록의 수많은 페이지들이 겹치면서 만들어내는 자작(自作)의 운명 말이다. ‘운명은 내가 개척 하는 거야‘ 라고 하며 자신이 만들어 간 삶을 비망록에 적으려고 하면서도, 확신과 불안의 사이에서 겉도는 사람들의 불안함도 함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삶이 ‘실낱같은 것’이라고 한다. 시인의 삶은 실낱같아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와 같이 삶을 겉도는 사람들은 실낱을 잡으려고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아 그를 쉽게 잡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래서 시인은 비망록에 앞으로 후회와 허망으로 나아갈지도 모르는 기억을 적는다.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라고 비망록을 채우지만 그는 채우는 것으로 제 할 일이 끝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채움의 단면에는 비망록 안의 기록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이유가 있다. 아마 실낱같은 것이 삶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절벽에서, 그리고 강물에서 시인이 계속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닌가. 절벽과 강물 같이 절박한 상황에 있다면, 적어도 그 때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이전의 기억들을 담은 기록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시인을 비롯한 사람들은 삶의 흘러감 그 중간에서 운명을 직접 만들고 끝내 매듭지어버리는 것을 반복한다. 시인의 스물넷, 그리고 스물다섯과 같은 나이테처럼,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려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시인이 자신의 운명이 ‘행복을 가장한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거나 ’보이는 것과는 다른 실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것으로 시인의 비망록이 멈추지는 않지 않는다. 비망록에 무엇을 적든, 어떤 것이 기억하고 싶은 기억이고 어떤 것이 지우고 싶은 기억인지 비망록의 주인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을 비롯한 우리들은 자신의 비망록에는 무엇이 적혀야 하는가, 기억하고 싶은 기억만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던진다. 그 질문들 속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비망록의 모습에게 솔직해 지는 것은 자신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편지나 전하지 못했던 소식을 발견한 시인의 몫인 것이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는’ 시인의 비망록은 아름다움의 이면에 비겁함을 가진 하나의 기록이며, 책이며,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