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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하 Sep 20. 2017

치유의 식사 한 끼

<카모메 식당>의 자가 치유 능력

어제 밤을 꼴딱 새워서 영화 <카모메 식당>을 봤다.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봤다.


'아무 생각 없는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날이 딱 어제였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단 하나의 생각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일일이 하나씩 다 정리하기보다, 그냥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는 것이 더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 어제가 딱 그런 날이었다.




카모메 식당의 주인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핀란드라는 타지에서 홀로서기에 나선 사치에.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은 '결혼했냐'이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았고, 혼자 핀란드에 와서 식당을 차렸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사실 그런 말들을 사치에는 일본에서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분주한 식당을 차분한 손놀림으로 장악하는 카모메 식당의 주인, 사치에. 영화 내내 야무지고 센스 넘치는 그녀를 닮고 싶었다.


결혼하지 않았고, 식당을 혼자 외딴 타지에 차렸고, 처음엔 식당의 손님이라고는 매일 무료 커피를 마시러 오는 남자밖에 없지만, 우연히 갓챠맨 주제가를 통해 알게된 미도리와 함께 식당의 메뉴를 개발하고, 식당의 정체성을 점차 찾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에게 '코피 루왁' 핸드드립의 맛을 알려준 남자가 나타나게 된다. 사치에는 그에게 배운대로 핸드드립 잔에 코피 루왁 가루를 담고, 가운데를 검지로 한번 누른 후, 나지막히 속삭인다.


코피 루왁


사치에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배운대로 핸드드립을 하는 장면은 <카모메 식당>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코피 루왁' 주문이 효과가 있었는지, 식당의 사람들은 갑자기 커피의 맛이 훨씬 좋아졌다고 좋아한다. 사치에는 그 후 가장 맛이 좋고 귀한 코피 루왁 드립을 그녀의 식당을 도와주는 사람들과 단골손님과 함께 공유한다.




카모메 식당의 메인메뉴는 오니기리(주먹밥)이다. 초반 메뉴 개발 단계에서 사치에는 핀란드 사람들이 즐겨먹는 가재, 순록고기 등을 넣은 오니기리를 만들지만 결국 그녀는 가장 맛있는 건 아무것도 넣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오니기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고슬고슬한 밥을 손으로 여러번 뭉쳐 둥근 삼각형으로 만드는 모습은 저 한 접시의 오니기리를 더 기다리게 만든다.


오니기리라는 음식을 처음 보는 핀란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오니기리를 맛있게 먹는 일본인을 신기하게 쳐다본다. 그렇지만 한 주먹의 오니기리가 주는 충만함은 출신지와 상관없이 같았을 것이다. 오니기리를 눌러만든 정성이 그 맛에서 그대로 느껴졌을 것이다. '설마' 하고 오니기리를 한 입 베어문 그 다음, 연이어서 한 입을 더 베어무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만든다.


그 후, 부쩍 오니기리를 포함한 카모메 식당의 요리를 찾는 손님들이 늘어난다. 연어구이 정식, 돈카츠, 계란말이, 닭고기 가라야게, 그리고 향긋한 계피롤까지. 사치에가 직접 내린 커피를 포함해 모두 그녀의 정성 뿐만 아니라 그녀의 생각이 담긴 음식들이 손님들에게 퍼져나간다.


카모메 식당이 주문과 동시에 음식 조리를 하는 모습은, 손님 한 명 한 명에 대해서 사치에의 정성이 들어있음을 보여준다.


손님이 몰려와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리고 야무지게 연어를 굽고, 계란 푼 것을 섞고, 갓 구운 계피롤빵을 꺼내서 차례로 대접하는 모습은 영화를 보는 내내 사치에를 닮고 싶다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소신인 그녀가 차린 카모메 식당은 바로 자신이 '싫지 않아서 하는 일'이었다.




영화를 보다보면, 굳은 심지 같은 사치에의 모습으로부터 세상에 자신이 해야하는 많고 많은 일들 중 '싫지 않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의 소신에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것이 아닌가. 자신이 '싫지 않은 일'을 찾는 것 또한 그녀 나름의 많은 생각과 시행착오를 거친 것이었을 것이다.


'부인 업고 달리기 대회', '맨 손으로 기타 치기 경연대회'에 반해서 핀란드에 온 마사코는 자신의 주변에서 여유를 찾는다.


매 번 커피를 몇 모금 마시다 말고 무언가를 찾으러 나가는 여행객 마사코는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여유를 그녀의 주변에서 찾는다. 그녀의 '여기 핀란드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여유로워 보이냐'는 질문에 토미-매번 커피를 마시러 오는 청년-가 '숲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하자 커피를 마시다 말고 바로 숲을 찾으러 나가는 마사코이다. 사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커피를 마시는 것이 당장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아니였는가.


그런 마사코를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견디지 못하는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커피를 마시는 날보다는 잠을 깨야하니까, 과제를 하기위해 커피를 마시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어딘가로 여행을 가야한다면 집에서 최대한 멀리, 무언가를 볼 수 있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카모메 식당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사치에를 비롯한 사람들은 모두 서로를 통해 여유를 찾고, 스스로를 치유한다.


여유, 그것을 다른 한 면에서는 '그 동안의 소모에 대한 치유'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많은 생각들을 가끔은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여유를 즐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카모메 식당>의 여유가 그동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즐기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맛있는 한 끼 식사를 먹고, 무언가를 위한 커피가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한 커피를 마시는 것. 그 시간은 조금 빠르게 달려온 시간들에서 소모된 나를 다시 충전시킬 수 있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여유를 즐길 줄 아는 것은 하나의 큰 축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말은 조금 더 맛있는 식사를 하고, 더 맛있는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무언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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