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피 Dec 24. 2023

친구의 눈빛에 숨은 샤덴프로이데

그림 : 마르크 샤갈 <비테프스크 위에서>


한때는, 그러니까 아주 어릴 적도 아닌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한 무리의 친구들과 왁자지껄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서로 비슷한 처지라 느끼기도 했고, 그래서 함께 맥주 한 잔 안주로 삼을만한 빌런들도 있었죠. 그러다 사는 모습이 달라지고, 저마다의 상황과 문제들이 달라지면서는... 아, 이래서 나이 먹으면 외로워진다고들 하는구나, 혼자 지내는 시간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하는구나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사회에서 만난 이들과는 조금은 다르다 믿었습니다. 이해관계에 묶이지 않은, 그저 함께 웃고 떠드는 시간이 즐거운 사람들이라고요. 더 나아가서는,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나, 정말로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상대들이라고 말입니다. 저에게 몇 가지 일들이 생기기 전까지는요.


최근 몇 년에 걸쳐 어려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올해는 건강상의 문제로 유독 힘들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할 수 있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게다가 일도 떠났기에, 제가 올라타 있던 빠른 유속의 물길에서도 벗어난 기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제 상황에 대해 친한 친구들 몇몇에게 가감 없이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냐'며 함께 안타까워해줄 줄 알았거든요.


그리고 곧 깨달았습니다. 무슨 말을 하건, 그들의 눈 속에서 '샤덴프로이데'가 피어난다는 것을요. 한껏 위축되고 약해진 마음에 상처가 되더군요. 그래서 '아, 이 시기는 혼자 버텨야 하는구나'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놀랐고, 원망스러웠고, 밉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샤덴프로이데'는  독일어로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거나, 실패나 좌절을 맞이한 이를 보고 '고소하다'라고 느끼는 것, 넘어지고 엎어지며 망가지는 실수 비디오를 보면서 웃는 심리가 다 같은 맥락이라고 합니다.




원수에게 100억을 주느니,
내가 받을 1억을 포기한다





언젠가 예능프로에 나왔던 이야기인데, '내가 1억을 받으면, 원수가 100억을 받는다'는 상황일 때 사람들은 어떻게 선택할까? 실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꽤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1억을 포기하겠다 결정했다죠. 나도 이득을 보지만, 원수가 더 큰 이득을 보는 상황이 너무너무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도, 그럴 거 같기는 합니다.


샤덴프로이데에는 주로 공격, 경쟁, 공정 등의 요소들이 영향을 준다고 하는데요. 이 경우에는 세 가지 요소가 고루 반영되어 있는 듯합니다. 반대로, 긍정적인 상황에서 발휘되는 '샤덴프로이데'도 있다고 합니다.




네가 가던 가시밭길,
그 실패로 돌아 나올 수 있기를




애정을 가진 상대가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하다가, 어쩔 수 없는 실패로 인해 다시 옳은 길로 돌아가려고 할 때도 샤덴프로이데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요. 이 상황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을 듯합니다. 우선 '가시밭길'이라는 것이 주관적일 수도 있기 때문인데요. 명백하게 잘못된 상황일 수도 있지만, 상황과 맥락에 따라 판단이 어려운 상황이 우리 삶에서는 더 많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렇게 상대의 상황이나 선택에 대해 '판단/평가'를 강하게 하다 보면 (관계의 역학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칫 가스라이팅이나 오지랖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을 테니까요.




너의 실패나 좌절이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었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대다수의 샤덴프로이데는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진화적 관점에서, 우세한 종이 살아남았고 그 흔적으로 우리는 쉼 없이 누군가와 비교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인가 노력해 이루거나 성취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쉬운 방법이 바로.... 누군가의 실패나 좌절을 확인하는 것일 테니까요.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 사실을 확인하며 스스로의 경쟁력을 확인하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식상하고도 관습적인 드라마나 소설,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슬픔, 힘든 상황에서 위로를 받는 모습을요. 제게 상처가 되었던 것도, 이런 맥락이었는데요. 이 친구만은 나의 상황에 공감해 함께 슬퍼해 줄 것이라고 믿어왔는데, 그 눈빛 속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다니... 처음에는 충격적이었죠. 그리고 올해 놀랍도록 많은 친구들의 눈 속에서 샤덴프로이데를 보았고, 그 와중에 정말 예상치 못하게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힘든 시기에 인간관계가 정리된다더니, 이런 의미였을까... 싶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과거에 힘들어하던 어떤 이들의 얼굴들도 떠올랐습니다. 저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어쩌면 그들의 실패와 좌절에서 위안을 얻으면서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았을 거라고요. 우리는 모두,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하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었고, 비슷하게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으니까요.




인생은 고통이라는 부처의 말씀처럼




상황적으로도 힘들었고, 건강적으로도 힘들었고, 인간관계에서까지 상처를 받게 되니... 아무래도 인간관계에서도 디톡스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서 혼자 책이나 넷플릭스를 보고,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하고, 또 명상을 했죠. 정말 필요해서 명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상수업까지 듣게 되었는데, 그 수업 중에 '인생은 고통'이라는 부처의 말씀이 명상철학의 밑거름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매우 개별적이고 독특한 것으로 개인화함으로써 고통을 더 가중시키는데, 누구에게나 나름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그러니까 '고통의 보편성'을 깨닫고 나면 조금 더 가벼워질 수 있다고요.


종교적 색채를 빼고 명상철학과 이론 기반으로 정규화된 프로그램으로 만든 MBSR  명상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기본적으로 MBSR 명상수업은 그룹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떤 기준들을 두지 않고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다고 합니다. 처음 미국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기에 다양한 인종, 연령대, 성별, 학력 수준, 고통의 종류 등등... 다양한 특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그 사이에 존재하는 '보편적 고통'을 깨닫게 하는 거죠. 그렇게 각기 다른 종류의 고통을 듣고 나면, '아, 나만 이렇게 고통스러운 게 아니구나,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니구나' 하는 위안과 함께 활력을 얻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감정 역시 샤덴프로이데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이 모임에서 힘겨움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는 점일까요?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다들 평화롭게 잘 지내는데 나만 힘들고 모자라 보이는 것 같다고 느낀다면... 여기서는 '아, 모두들 저마다의 아픔을 가지고 있구나'하는 '고통에 대한 공감대'가 생기는 거죠.





각자의 어깨에 올려진 십자가의 무게



1년을 돌아보면, 올 한 해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이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마음들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험적 인간이라고, 힘겨운 시기를 경험해 보고서야 어느 정도는 깨달은 게 아닌가 싶어요. 최근 몇 년에 걸쳐 움켜쥐고 싶었지만 내 것이 아니었던 것들을 서서히 놓아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올해는 특히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여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적당한 거리감과, 각자의 상황에 대한 이해, 그리고 함께하는 즐거움과 목적에 대해서 천천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죠.


결국에는 시절인연이라고, 관계 역시 '즐거움-필요' 두 가지 축에 의해 작동하지 않나 싶습니다. 함께 있어서 즐겁거나, 함께 있어서 도움이 되거나. 그 외의 관계는... 인생 전반에 걸쳐 한두 명이면 족하고, 또 그 한두 명에 감사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병든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처럼요. (요즘에는 가족이 혈연을 뜻하기보다는, 함께 밥 먹고 살며 마음으로 연을 이룬 이들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해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는, 배신감(?)까지 들게 만들었던 몇몇 친구들의 샤덴프로이데도 잊으려고 해요. 아주 잊히거나, 그것을 마주하기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 감정조차 '자연스러운 것임을' 받아들이려고요. 그렇게 받아들이고, 담백하게 지내다 보면 끊길 인연은 끊기고, 다시 연결될 인연은 연결되고, 깊어질 인연은 깊어질 거라고 믿어 봅니다.  





그래서 너는, 괜찮아?




그리고 그와중에... 그렇다면 제가 그 친구들에게 기대했던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담당의 선생님이나 심리상담사 선생님만이, 그리고 정말 소중한 가족과 친구 몇만이 해준 말이었어요. 언젠가 누군가 힘든 이야기를 하며... 이것저것 묻거나, 그 고통의 정도를 판단/평가하거나, 솔루션을 주려 하지 말고... 그저 진심을 담아 따뜻하게 "그래서 너는, 괜찮아?"라고 물어봐주고 싶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하던 일이 꼴도 보기 싫어질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