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질문]의 읽고 쓰기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챕터2
믿음은 사적인 것이고, 사실은 공적인 것이다.
'믿음은 사적인 것이고, 사실은 공적인 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신념 중 하나이다. 과학은 모두가 동의해야 하는 사실로 신앙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취향의 영역으로 밀려난지 오래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뉴비긴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을 통해 '지식조차 믿음에서 출발한다.' 말하며 위와 같이 단순 이분법적인 사고의 체계 혹은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경고한다. 즉 풀어 말하면 믿음 없는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지식은 우리가 먼저 '믿는 어떤 것' 위에 세워지는 체계라는 것으로 '난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라는 말안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또 다른 신념,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다원주의 사회의 착각
우리는 ‘다원성(plurality)’과 ‘다원주의(pluralism)’를 구분해야 한다. 쉽게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원주의는 그 현실을 넘어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진리로 가는 길이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진리로 가는 길이다.'라는 주장은 현대화된 세대가 만들어낸 또 다른 진리가 아니던가. 다윈주의는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겸손으로 자신을 위장하지만 결국 실제로는 진리를 말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결국 '당신만 옳다고 하지 말라'는 말 안에는 '아무도 옳지 않다,'는 다원주의의 본성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법정에서 사라진 창조주
비긴스는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를 통해 미국에서 창조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된 법정 사례들을 소개한다. 학교에서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쳐지지만 창조론은 '종교'로 분리되어 가르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증명의 문제이다. 진화론은 증명할 수 있다 여기고 창조론은 증명할 수 없는 개인의 신념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매우 모순적인 적용이다. 진화론 역시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우연으로 시작되었다는 전제, 생명은 목적 없이 진화되었다는 믿음으로 보이는 가정 혹은 전제, 그렇다면 생각해봐야 한다. 진화론은 증명인가 아니면 믿음인가?
모든 자들의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말씀을 풀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구원과 은혜와 영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이며 동시에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구원은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길이다. 모든 인생의 진리이며 모든 심판으로 죽어야 할 자들의 생명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모든 자들의 길, 진리, 생명을 한 개인, 혹은 일부 그 신념에 동의하는 자들의 이야기로 축소시킨다. 결국 너희가 믿는 믿음은 너희의 사적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만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이런 세상의 기준이 낮설다. 왜냐하면 그들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자들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평생 신앙 공동체라는 허울좋은 울타리 안에 갇혀 살아간다면 그들은 평생 세상의 기준과 요구에 대해 들어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 있는 청년이 직장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자. 믿음있는 학생이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다 가정해보자. 순간마다 일어나는 세상의 가치와 요구 앞에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을 꺼내놓는다면 모든 이들로부터 불편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때론 세상으로부터 '왜 공적인 영역에 당신 개인의 신념을 늘어놓느냐며' 핀잔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완곡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여기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그러면 묻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리는 결국 관계다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잠언 1장 7절의 이 말씀을 풀어 말하면 진리란 인간의 설명과 정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드러난다는 선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곧 지혜안에 머무는 자이며 성령의 은혜로 지혜안에 머물때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 두려워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곧 관계에 대한 반응이다. 그 관계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 위에 세워진다. 모순으로 가득차 생명을 죽이는 또 다른 믿음인 과학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계산되지 않는 신실함, 조건 없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가 믿음에 대한 이해와 선택 그리고 고단한 과정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게 아니라,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주시기 위해 우리를 먼저 불러주셨다는 것을 비로소 보게 된다. 그리고 개인을 넘어 모든 자들이 이미 본 그리고 보게 될 보편적이며 유일한 진리이다.
공공의 진리
뉴비긴은 '복음은 개인의 심리적 위안이 아닌 공공의 진리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단지 종교적 모임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개인의 삶을 넘어 교육, 정치, 문화, 사회 등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공간에서 이 진리는 선포되고 확인되며 영광받아야 한다.
수많은 상대적 신념이 난무하는 시대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명확하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행4:12)'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만큼 절대 진리를 상대 진리로 격하시키는듯 예수님음 말씀하셨다. 그리고 상대적 진리가 또 다른 억압과 폭거의 그림자이며 더 이상 공적인 영역에서의 복음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는 세상의 기준 앞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라. 두려워 말아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도대체 누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를 증명하신 예수님의 이 초대를 폭력으로 억압으로 배척으로 적용하고 사용하겠는가? 복음으로의 초대, 진리로 부르심은 배척이 아니다. 한량없는 은혜로의 초대이다. 진리의 절대성은 독점이 아니다. 수많은 진리 중에 하나의 진리는 독점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진리라고 불리는 수많은 거짓된 것 중에 유일한 진리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
프로질문러 [인생질문]의 읽고 쓰기 첫번째 Book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by Lesslie Newbigin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by 레슬리 뉴비긴' 챕터2 '다원주의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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