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질문러 인생질문의 나른한 오후의 短想(단상)
지난 20년, 나는 학교에서 교목으로 주로 중고생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교회가 아닌 학교라는 사역지는 아이들의 삶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탐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닌 때론 부모보다 아이들의 삶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아이들이 성적과 미래에 관해 얼마나 많은 부담과 고민과 좌절을 겪고 있는지 보고 있다. (물론 공부에 맘을 놔버린 아이들도 있지만)
며칠 전 뉴스를 보는데 귀에 들어오는 소식이 들린다. '전교 1등, 알고 보니 시험지 도둑, 부모와 교사가 모의하여 벌인 사기극' 어떤 지역의 학생이 고등학교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부모와 교사, 시설 담당자가 모의하여 시험지를 빼돌린 결과라는 것이 수사를 통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당사자 본인의 입장에 한번 사건을 되짚어보자.
아버지는 의사다. 언젠가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미 나는 의대를 가야 하는 운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 머리는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다. 노력을 안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해도 안된다는 것을 나 자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누가 먼저인지, 어떻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학교 시험지가 미리 내 손에 들어왔다.
처음엔 의심했다. 그러나 그 의심은 금방 사라졌다. 며칠 뒤 시험을 보러 갔는데 내가 미리 받아본 시험지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미리 답을 외워둔 나는 어렵지 않게 시험을 모두 풀었고 그렇게 나는 전교 1등이 되었다. 시험을 보고 돌아오니 엄마가 묻는다. '시험 잘 봤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지만 이내 대답했다. '응, 다 맞은 것 같아.' 기쁨을 참는 부모의 얼굴을 보고 나도 옅은 미소를 띠고 내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올백을 맞은 시험지를 살펴본다.
처음엔 이렇게 해도 되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 일상이 되었다. 이제 수업을 들어도 별 마음이 없다. 시험이 다가와도 부담도 없다. 어차피 우리 엄마, 선생님은 시험지를 몰래 훔쳐 내게 가져다줄 것이고 나는 그냥 답을 외워 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미 나는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으니 그토록 나 혹은 우리 가족이 원했던 의대에 나는 입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양심의 가책이 처음엔 있었나? 그러나 지금은 별 생각은 없다. 물론 외운 답을 써 내려갈 땐 심장이 두근거린다. 수업 시간에 전교 1등이라는 이유로 선생님 혹은 친구들이 공부에 대해, 어려운 문제에 대해 물어보기라도 하면 좀 후 달린다. 그러나 뭐 이것도 늘 있는 일은 아니니 감당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계속 전교 1등이기 때문이다.
며칠 뒤 시험이 또 다가왔다. 엄마는 역시나 비슷한 날짜, 비슷한 시간에 최대한 은폐가 되는 옷을 입고 나가신다. 나는 엄마가 어딜 가는지 안다. 그러나 잘 다녀오라는 말도, 들키지 말라는 말도 못 하겠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차피 공부를 안 해도 전교 1등이지만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여기까지가 그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써 내려간 그간의 일이다. 좀 와닿는가? 내가 그 학생의 입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상, 생각하며 드는 한 가지 질문은 이 아이의 상태, 마음, 감정이다. 과연 이 아이의 삶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을까?
가장 불행한 인생은 기회가 없는 인생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기회가 없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인생이다.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고 한다. 성공이란 실패의 과정을 통해 오는 결과라는 뜻이다. 그런데 기회가 없다고 여기는 인생, 즉 실패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인생은 그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 번의 실패가 열 번의 성공을 얻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인생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학생은 왜 시험지를 훔쳐서까지 전교 1등을 유지하려 했을까? 그 점수가, 그 결과가 자신 인생의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부모와 교사는 왜 몰래 교무실에 숨어들어 시험지를 훔쳤을까? 의사 가문인 집안에 자녀가 의사가 되어야 성공 아니 평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의사가 되지 않으면 인생의 목적이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교사는 왜 이 범죄에 가담했을까? 수천만 원의 돈, 결국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며 동시에 한 번의 선택을 뒤집을 수 없으며 자신의 선택이 드러날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부정행위, 시험지 절도 행위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의 단면이다. 우리 모두는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 혹은 두려움 가운데 살아간다. 왜, 죄를 들키는 순간, 연약함이 드러나는 순간, 내 배경이 드러나는 순간, 내 실력이 들통나는 순간 그 순간이 내 종착역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늘 가면, 페르소나를 얼굴에 덮고 살아간다.
가면을 쓰는 인생, 즉 실패를 두려움, 인생의 종착지로 여기는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이다. 풀어 말하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단순한 질문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말하면 입만 아프다. 누구긴 누구이겠는가? 날마다 실패하고 한심하고 철없고 무능력한 존재이다. 아니 그러한가? 당신은 전능한가? 실패를 벗어날 수 있나? 한심하지 않나? 능력이 출중한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철저히 무능력한 그래서 실패와 같이 호흡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실패를 피하고 두려워하는 죄의 본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 실패 앞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야곱을 보자.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별명이 '빼앗는 자'였다. 형의 장자권을 탐했고 아버지를 속여서 복을 쟁취했다. 야곱은 방식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야곱이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으려 했던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즉 형이 자신의 모든 복을 가져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으로 야곱에게 있어 형 에서는 실패의 원인 제공자였다. '형만 없었다면 내가 받을 수 있는 건데' 야곱은 늘 형 에서를 자신의 실패의 원인으로 이해하며 그에게서 복을 빼앗아 올 계략들만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가? 도망치는 삶이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야곱의 고백은 서글프다. '나의 인생이 나그네였다.' 무슨 말인가? 자신은 평생 도망치며 살았다는 고백이다.
실패를 보완하고 피하기 위해 인생을 걸었던 야곱이 결국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된다. 그러나 야곱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하나님과 죽을 씨름을 해서라도 그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왜 두려웠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내려치시고 떠나겠다 말씀하시는데 이때 비로소 야곱은 야곱 자신의 인생을 뒤집는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 '주여, 저를 떠나지 마옵소서.'
평생을 실패를 벗어나기 위해 극복하기 위해 속이며 살았지만 야곱의 마지막 고백은 결국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임마누엘의 복이며,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실패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닌 능력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야곱이 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뭐라 하시는가? '너는 이제 야곱이 아니야, 너는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뤄 이긴 자야.' "네 삶의 실패는 이제 더 이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며, 너를 짓누르는 세상의 모든 실패가 네게 쏟아진다 해도 걱정하지 말아. 너는 하나님을 이긴 자야." 이것이 속이는 자 야곱을 하나님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이다.
그 축복 이후 야곱의 삶을 보자. 실패를 두려워하고 도망치던 인생 야곱이 이젠 모든 실패와 부끄러움과 수치와 마주한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한다. 그리고 야곱은 이 땅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구원의 통로로 사용된다. 언제? 야곱이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며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숨어들었을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쓰려한다. 더 경건한 모습, 더 성숙한 모습. 내가 가장 어이없는 기도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불편하지 않은 존재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다. 물론 그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심정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워딩은 늘 나를 불편하게 한다. '도대체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불편하지 않은 존재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또한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불편하여 쓰시지 못한다면 그건 하나님을 너무 우리의 관점으로 끌어내린 것이 아닌가?'
믿음은 연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속인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가면을 쓴다고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 시험지 절도 사건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렇게 3년 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해서 정말 의대에 갔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의대 1년 1학기를 버틸 수 있었을까? 아마도 의대에 가는 순간 부모와 학생은 또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의대까지 갔는데 이걸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또 부정을 행할 수 있을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점수를 얻게 될 수 있을까? 잘은 몰라도 아마 대리 시험, 대리 과제 별별 일을 다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고? 단순하다. 그 학생은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만 있고 두려움만 가득하지 그것을 해결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부어지는 능력, 은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는 확신, 오늘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최선이라는 믿음, 그리고 느려도 정직하게 주어진 삶을 자족, 만족,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향한 최선의 예배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아이가 처음부터 "나는 완벽하지 않아요. 실수도 하고, 때로는 실패도 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 아이의 부모가 성적이 아닌 그 자체로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그 아이는 가짜 성적이라는 허상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러나 안돼도 괜찮아. 네 수고와 노력과 땀이 네 삶에 가장 귀한 밑거름이 될 거 기 때문에 그래. 하나님께 기도하고 오늘 하루 주어진 삶을 누리며 살아보자. 세상의 가치로 너를 평가하지 말고 말씀에 근거해 너를 생각하며 실패를 피하지 말고 마주하고 연약함을 인정하고 날마다 도우심을 구하고 잘해보자.' 부모가 이렇게 가르쳤다면, 교사가 이렇게 조언했다면 이 아이의 인생은 이토록 낭비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을 낭비하는 삶은 다른 게 아니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죄의 강박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고 사는 인생이다. '나는 실패하면 안 돼. 이걸 이렇게 하면 해결하고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아니,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그런 요행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느려도 정직하게 살자. 느려도 정직하게 살자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날마다 실패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 없음을 고백하며 주어진 곳, 부르신 자리에서 주어진 일들을 주님께 하듯 공부하고 일하고 먹이고 입히고 살아가는 것이다. 매일 그렇게 매일.
프로질문러, 인생질문
biblestorys@naver.com
여러분의 인생질문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나쁜 머리 게으른 일상이지만 최선을 다해 답을 해보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