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고통의 문제

고통은 축복의 포장지라고?

by 인생질문

다시, 고통의 문제

고통의 문제, 고통의 이유를 아는 것은 믿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동시에 답이다. 왜냐하면 연약한 인간은 고통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으로 인한 고통,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갑작스러운 죽음, 일상을 보내기 위해 거리에 나선 수많은 청춘들의 비참한 죽음 등 우리는 늘 고통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위협받는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과 마주한 고통 앞에서 납득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서로 충돌하는 고통의 문제는 늘 연약한 우리를 괴롭게 한다.


고통의 문제는 우리 개인의 삶 깊숙히 들어와 있다. '나는 왜 이렇게 건강이 좋지 않을까? 우리 집의 환경은 왜 이렇게 불행할까? 나는 왜 남들처럼 무언가를 하지 못할까? 나는 왜 내 마음, 정신을 절제, 관리하지 못하고 늘 혼란스러울까?' 작은 영역에서 큰 영역까지 우리의 삶 전체는 사실 고통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우리는 고통과 함께 걷고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삶에 깊이 박혀 있는 고통의 문제가 단지 인간이 타락한 죄인이라서 자연스럽게 감당해야 할 죄의 결과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우리는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도 죄의 댓가를 우리 스스로 모두가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사형선고이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죄로 인해 인생을 살아가며 고통의 댓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면 (오버해서 말해보면) 나의 죄 댓가는 결국 내가 생을 살아가며 다 치르는 것은 아닌가?(오버해서 말한거다. 오버해서)


오버해서 말한 나의 주장이 (말씀을 따라 보면)터무니 없는 괘변이기에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며 만나는 다양한 고통의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질문해야 한다. 우리 삶에 깊이 뿌리 내린 고통의 문제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반드시 구하고 열릴때까지 두드리며 그 답을 얻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는 이뤄질 수 없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이뤄질 수 없기에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수 없으며 결국 종교적 행위를 반복하는 형식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해보자. 고통의 문제는 왜 우리 삶을 예고없이 찾아오는가? 왜 고통의 문제는 이토록 질기게 우리를 아프게 하는가? 왜 고통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믿음 없는 푸념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라며 낙심하게 하는가?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알고 지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이 고통의 시작과 이유와 그 결과를 모른체 온 몸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가? 우리가 만일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체 온 몸으로 예고없이 간혈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을 버티고만 있다면 그 버팀의 시간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 버팀의 끝에는 회의주의 혹은 비관주의로 우리의 삶을 파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매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고통 앞에서 의연할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1940년 C.S 루이스는 '하나님은 선하시며 전능하시다. 그런데 세상에는 왜 고통이 있는가?'라는 의문으로 [고통의 문제]를 기록했다. 냉철한 변증가이며 동시에 나니아 연대기를 읽고 편지를 보낸 세상의 아이들에게 답장을 써줄만큼 따뜻한 마음의 신학자가 모든 인생을 사로잡고 뒤흔들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고통의 문제]를 기록한 것인데 내 방에 들어오면 책장에서 가장 잘보이는 곳 한 가운데 고이 모셔둔 책으로 청년 시절 가난과 폭력,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에 대한 질문이 있던 나에게 너무 큰 위로와 정리를 해준 책이다.


C.S루이스는 '고통이란 축복을 포장한 포장지'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가 쿠팡을 통해 택배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 택배의 포장지는 저주로 가득찬 고통의 포장지이다. 그래서 포장지를 뜯고 싶지 않고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만큼 위협적인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인고의 시간을 통해 그 포장지를 뜯어보면 결국 그 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이 가득차 있다고 말하며 C.S루이스는 고통이란 결국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고 강하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 말한다.


C.S루이스는 '고통이란 하녀가 왕비가 되는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신데렐라를 예로 들어 볼품없는 하녀의 삶에서 고통을 통해 왕비로 거듭나게 된다고 말한다. 사실 신데렐라의 예시가 내게 크게 다가오진 않았지만 무슨 의도로 설명하는 것인지는 알게 되었다. 나의 이해로 풀어 설명하면 고통이란 어부에서 제자가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고통이란 먹고 살기 위해 한 마리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어부에서 죽음의 권세를 끊고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끌어 올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라. 예수님을 따르던 3년 그리고 예수님 승천 이후 순교의 자리까지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라. 그들의 삶은 늘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어부였던 그들을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통로로 이끌어갔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 까지 죽을 것 같았을까? 마치 시험을 보는 학생처럼 피하고 싶었을까? 아니다. 제자들은 고통의 순간을 지나며 행복했다. 즐거워했다. 때론 과하게 행복했다. 왜 그랬을까? 첫째는 제자 스스로의 성장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 모든 과정에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의 문제]는 산만하게 뿌려진 생각의 조각들을 정결하게 맞춰주는 멋진 책이다. 나는 이태원에서 일어난 비참한 죽음 앞에 다시 생각의 조각들을 정리하고자 오늘도 이렇게 누가 잘 읽지 않는 글들을 끄적거리며 생각을 정돈하려고 나름 애를 써보려 한다.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은 결국 나를 향한 날카로운 칼이 되어 수많은 고통의 문제 앞에서 믿음이 흔들리는 위험한 자리로 끌고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고하지 않는 게으름은 가장 큰 죄'라고 한다. 사단의 역할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사고할 수 없도록 생각하고 질문할 수 없도록 고통의 문제에 매몰되게 하거나 반대로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고통의 문제를 우선순위 저 뒤로 몰아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비록 고통은 축복을 포장한 포장지이며, 고통은 어부를 제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현실이라 해도 오늘 우리 앞에 일어난 모든 고통의 문제에 답은 되지 않는다. 적어도 아직까지 내게는 혹은 우리에게는. 그러나 삶의 모든 질문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조각조각 흩어진 생각 정돈의 과정을 반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각자 믿음의 분량에 맞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을 깨닫게 해주시리라 믿는다.


프로질문러, 인생질문 작가 유찬호

biblestory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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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머리 게으른 일상이지만 최선을 다해 답을 해보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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