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질문]의 읽고 쓰기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챕터3
세상은 '믿음은 선택이고 아는 것은 증명이다. 믿음은 개인적인 것이고 아는 것은 객관적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세상은 믿음에 대해서는 다원주의적이면서도 사실에 대해선 절대주의적이라고, 마치 과학은 누구나 동의해야 할 보편적 사실이고 신앙은 아무나 믿지 않아도 되는 선택적, 개인적 취향인 것처럼 여긴다. 이분법적으로 스스로 평가받기를 거부하는 세상이 자신들만의 이분법으로 진실 앞에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나는 믿는 것을 통해 이해한다.' 어거스틴의 말이다. 풀어 말하면 진리를 알기 위해선 먼저 그 진리를 신뢰해야 한다는 통찰이다. 뉴비긴 또한 책을 통해 이것을 부각시킨다.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말할 때, 사실 그 지식도 특정한 믿음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지식은 믿음으로 시작되며 믿음이 없다면 지식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망원경을 통해 우주의 별빛을 해석할 수 있는 것도 결국 망원경이 올바른 데이터를 제공한다고 믿기 때문 아닌가? 결국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망원경 앞에 앉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세상의 모든 지식은 우리가 신뢰하는 도구, 언어 그리고 전통에 기반하며 과학도 그 예외가 될 수 없다. 과학이 객관적 진리라고 믿는다면, 그 믿음 역시 신념으로 구분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믿음은 배제한 앎은 결국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주장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겠다.'는 또 다른 신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빛을 환하게 비춰 무지를 몰아내자며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하며 '전통'과 '권위'에 대한 반감을 심어놓았다. '감히 알라(Dare to Know)'라는 칸트의 구호는 신성한 경외심조차 해체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칸트의 이 구호는 결국 자기 기만의 문을 열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식의 사상은 결국 모든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냉소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권위를 배제한 지식은 근거 없는 자율성과 허무로 치닫게 될 뿐이다.
뉴비긴은 이와 같은 과정에 반드시 ‘마음의 회심(radical conversion of mind)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틀,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말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관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야기, 서사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과학의 세계에도 권위는 있다. 특정 이론이 과학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학계의 공적 합의와 전통적 방법론을 모두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결국 과학도 '공동체적 신뢰'위에 서 있게 된다는 말이다. 기독교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성경의 권위 아래, 수많은 세대가 해석하고 삶으로 증명해온 신앙의 공동체로서 이것은 단지 개인의 취향이 아닌 '공동체적 신뢰'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앙은 항상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성장하며, 성령이 세우신 질서, 즉 권위 안에서 전통과 성경의 해석을 통해 성숙해져간다. 이와 같은 방식이 권위와 전통을 거부하는 이 세대 속에서 교회가 여전히 신앙의 지혜를 지키고, 다음 세대에게 진리를 전수하는 방식이다.
복음은 선택 가능한 여러 의견 중 하나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라고 선포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을 위한 위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공적 선언이며 동시에 길을 잃어버린 허무한 삶, 상실된 현실앞에 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와 목적, 방향을 알려주는 유일한 진리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의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치유 프로그램'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 죽음 이후에 유일한 소망을 제시하는 길이다. 따라서 복음은 삶의 모든 영역, 교육, 정치, 문화, 예술, 과학 등 모든 영역에서 공공의 진리로 작용해야 한다. 세상의 그 어떤 세계관과 철학, 이념과 가치도 인간의 존재목적, 삶의 과정 그리고 그 이후의 죽음과 심판에 대해 명확히 그 길을 제시하는 종교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이 유일한 진리는 교회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 세상 가운데, 시장 한 복판에, 인터넷과 SNS 공간 그 어디라도 선포되어야 할 생명의 선언이다.
믿음 있는 자가 교실에 들어가고, 직장에 나아간다. 그 순간부터 그는 ‘믿는 것’을 감춰야 하는 사회와 맞닥뜨린다. “그건 너의 신념이야.” “여긴 네가 교회가 아니야.” “객관적인 얘기만 해.” 사람들은 말한다. 그 말은 결국 이렇게 들린다. “네가 믿는 진리는 공적이지 않아.”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라.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진리는 단지 정확한 지식이 아니다. 진리는 관계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과 맺는 그 경외의 관계, 사랑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맺어진 그 은혜의 관계에서 진리는 살아 숨쉰다. 그리고 그 진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모든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내가 믿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보게 될 분’이다. 진리의 절대성은 배타가 아니라, 은혜의 확장이다. 수많은 거짓 진리들 사이에서, 유일한 진리는 단 하나의 생명줄이다.
복음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밀실의 암호가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해 열려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때로는 복음이 ‘너만 옳다고 말하는 것이냐’는 비난을 받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복음은 모두를 위한 초대이다. 다만, 그 초대의 길이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점이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말해야 한다.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그 진리는 문이 닫힌 채 배타적인 통로로 사람을 걸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을 향해 활짝 열린 문’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는 어떤 종교적 규율을 지킨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특정 민족이나 특정 시대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 피는 모든 시대, 모든 민족, 모든 죄인을 향해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그러나 그 초대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초대장을 ‘명령’으로 오해하고, 은혜를 ‘억압’으로 뒤바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그 초대장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곧 복음의 향기요, 우리의 말과 태도, 우리의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진심과 희생이 곧 초대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초대장은 손에 들려진 종이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낸 사랑이다.
진리는 알고 끝나는 정보가 아니다. 진리는 삶을 변화시키는 부르심이다. 앎은 그 진리를 향해 다가가는 열린 자세이며, 믿음은 그 진리 앞에 무릎 꿇는 태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로만 진리를 안다고 하지 않는다. 진리는 우리를 불러 걷게 하며, 다시 걸어 나가게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재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진리의 잔치 자리에 초대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앎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다. 세상 끝까지 초대장을 들고 가는 자, 그것이 바로 복음으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다.
교사이자, 목사로 학교에서 20년 가까이
가르치고 읽고 쓰고 듣고 살아갑니다
프로질문러, 인생질문 작가 유찬호
biblestory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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