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넌 그 인간들 전부보다 훨씬 가치 있어

다섯번째 인생질문, '친구는 뭘까?'

by 인생질문

They're a rotten crowd… You're worth the whole damn bunch put together.

그들은 모두 형편없는 인간들이야… 하지만 넌 그 인간들 전부보다 훨씬 가치 있어.

『위대한 개츠비』



허영의 끝에서 만난 진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영화로 옮긴 작품, 표면적으로는 1920년대 미국의 화려한 재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그리고 그 폐허 속에서 발견되는 진정한 가치에 대한 신학적 그리고 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개츠비의 웅장한 저택과 화려한 파티들은 단순한 부의 과시가 아닌 데이지라는 한 여인을 향한 절대적 사랑의 물질적 발현으로(나는 발광으로 표현하고 싶다.) 개츠비는 과거의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자신을 부와 명예를 한손에 거머쥔 존재로 자신을 재창조한다. 물론 엄청난 부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어째든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가난한 제임스 게이츠에서 부유한 제이 개츠비로의 변신한다. 자칫 개츠비의 삶이 화려한 성공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 인간이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지워버린 비극적 자기희생 혹은 사랑을 빙자한 사기극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부를 이루는 방법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수단도 모두 그럴싸한 포장지로 포장된 거짓과 위선, 기만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개츠비의 파티 장면들을 통해 1920년대 상류층의 향락과 허영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한다. 샴페인이 흐르고 음악이 울려퍼지는 화려한 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개츠비의 부를 소비하면서도 그를 진정으로 알려 하지 않는다. 개츠비는 향락의 밤을 제공하는 수단 일 뿐, 개츠비의 존재는 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려한 파티가 시작되고 이내 파티는 끝나면, 손님들은 떠나며, 개츠비는 언제나 홀로 남는다. 개츠비가 사랑하는 데이지도 다를 것이 없다. 개츠비의 한결같은 순수한 사랑앞에서 그녀는 자신이 속한 부와 지위의 자리, 안전하다 여겨지는 기득권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녀에게 개츠비는 단지 젊은 시절 로맨틱한 한 장의 추억일 뿐, 현실 앞에서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개츠비를 곁에서 지켜보는 한 명의 사람, 닉 캐러웨이. 그는 개츠비를 곁에서 지켜보며 점진적으로 그의 진심 어린 사랑과 순수함을 보며 깊은 공감을 가진 인물이다. 영화 후반, 모든 사람들이 개츠비를 떠날 때 유일하게 남는 한 사람이 바로 닉 캐러웨이다. 닉은 개츠비 주변에서 파티와 허영으로 가득찬 사람들, 특히 개츠비가 사랑하는 데이지 그리고 그의 남편 톰, 그 외 등장하는 조던과 같은 상류층 인물들에 대한 실망과 절망을 느낀 후 오직 자신 곁에는 개츠비만이 진실되고 참된 인간됨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개츠비에게 고백한다.


They're a rotten crowd… You're worth the whole damn bunch put together.

그들은 모두 형편없는 인간들이야… 하지만 넌 그 인간들 전부보다 훨씬 가치 있어.

『위대한 개츠비』


생각해보면 개츠비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 아니 인정받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자신이 모든 것을 받쳐 사랑하고 싶었던 한 여인과 함께 하지 못했던 이유를 가난하고 능력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찾으려 했던 개츠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을 위반해서라도 막대한 부를 쌓으려 했던 사랑으로 포장된 개츠비의 열등감, 가난한 자신을 지우고 부자인 개츠비로 살아가기 위해 제임스 게이츠에서 제이 개츠비로 자신의 삶을 지워버린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이 아닐까? '너는 그 인간들 전부보다 훨씬 가치 있어.'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얼마전 토트넘을 떠나 LAFC로 이적한 손흥민을 예로 들어보자. 한 방송 인터뷰에서 손흥민 아버지의 인터뷰 내용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손흥민이 월드클래스 수준의 선수라고 칭찬하는 기자에게 손흥민 아버지는 정색하며 '미안합니다. 그런데 월드 클래스 아닙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고 지금까지도 온라인 상에서 사람들은 손흥민이 '월클이다.' 혹은 '아직은 부족하다.'라고 썰전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왜 손흥민이 월클인지 아닌지에 대한 언쟁이 있게 되었나? 그가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 EPL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내며 아시아인을 넘어 축구인으로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쉽게 풀어 말하면 월클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손흥민이 이뤄놓은 업적이 충분히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보통 어떤 별명이나 손흥민과 같은 언쟁이 생길 때에는 대부분 그 대상이 무언가를 이뤄놓았을 때 생기게 된다. 개뿔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누가 '넌 월클이야.'라고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들어주기나 하겠는가? 무시당할 뿐이다.


성경을 보자.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들 중 늘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 제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이다.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셨고 사도 요한에게는 사랑하는 제자 등 예수님은 자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이름 혹은 별명을 지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름 혹은 별명을 지어주는 방식의 순서가 독특하다. 예수님은 개뿔 아무것도 없는 제자들에게 먼저 별명, 이름을 지어주시고 그들의 삶이 그렇게 이름을 따라 완성되도록 만들어 가셨기 때문이다. 손흥민의 예를 또 들자면 (미안하다. 축구를 좋아해서..) 손흥민이 개뿔 아무것도 없을 때 그에게 '넌 월클이야,'라고 선포하고 그가 월클이 될 수 있도록 그의 축구 인생과 함께 하며 결국 그가 세계 최고의 리그에 월드 클래스가 되기까지 섭리, 이끌어 가셨다는 의미이다.

세상은 가치는 결과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넌 점수가 몇점이니?' '너는 어느 대학, 직장에 다니니?' '넌 차가 뭐니?' '넌 무슨 브랜드 옷을 입니?' '너희 집은 어느 동네니?' 이런 질문에 사람들이 '헉'할만큼 어떤 결과, 가치를 내놓으면 그제서야 세상은 그가 가진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함께 하려 한다. 마치 개츠비가 주관하는 화려한 파티에 개츠비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참여하는 그 어떤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생의 가치가 어떤 결과에 있지 않다고 확언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나라는 각각의 존재는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잃어버릴 수 없는 유일한 존재, 작품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유일한 존재라고 정의한다. 풀어 말하면 우리, 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내가 무언가를 소유했는지에 대한 '소유가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나, 세상과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존재를 지닌 '존재가치'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비참하게도 소유가치를 따라 사는 개츠비같은 사람들이 있다. 무언가를 얻으려 하고 없으면 불안하고 한명이라도 자신이 서 있는 줄 뒤에 세워야 안심하는 개츠비같은 사람들이 있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길 원하는 자들은 개츠비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들보다 우월한 무언가를 가지려 평생의 삶을 소진하며 살아가다 결국 혼자 남는다. 누구처럼, 개츠비처럼.


그러나 세상에는 존재가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무언가를 가졌는지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 온 것임을 믿기에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목적을 향해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에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유가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것과 똑같은 현실을 살아간다. 하지만 존재가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력은 자신의 인생에 몰아치는 어려움들이 자신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가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느냐를 통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다. 만물을 다 준다고 해도 아들과 바꿀 수는 없다. 아니 그런 시도 혹은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감히, 사랑하는 내 아들을 어떤 가치와 비교했다는 것 자체가 부모를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모욕이 있다. 아니 모욕이라고 표현했지만 잔혹한 일이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녀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가 자신을 어떤 것과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에 분노할만큼 자신이 독보적이고 유일하며 가장 존귀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얼마나 비극인가? 부모의 입장으로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아빠가 널 사랑해.' '아빠, 나는 잘 모르겠어요. 아빠가 날 사랑하는지, 왜 사랑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 아닐까?


청소년, 청년 사역을 하며 가장 안타까운 일이 바로 이런 개츠비와 같은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아이들, 남들보다 우월한 한가지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믿는 청년들,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금도 손에 뭐라도 들려있지 않으면 불안과 두려움, 우울감에 사로잡혀 삶이 무너지는 청춘들을 보는 일이다.


그들에게 시편 23편의 다윗은 참으로 기이한 인생이 아닐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윗, 원수가 앞에 있어도 마음 편하게 밥상앞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던 다윗은 이상주의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윗이 시편 23편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라. 그 해답은 시편 23편 1절, 그 고백 첫 마디에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무슨 말인가? 다윗은 자신의 가치를 자신 손에 들려진 칼에 두지 않고 자신을 돌보는 목자, 여호와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한다. 풀어 말하면 '뭐래, 여호와가 내 목자야.' 마치 범죄와의 전쟁에서 그 최민식처럼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세상, 느가 뭐꼬, 내가 말이야~ 여호와가 내 목자야! 나 어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즐겁게 걷고 원수 앞에서도 마 밥 막 먹었어!'


'개츠비, 넌 네가 동경했던 저 사람들을 다 모은 것보다 더 존귀한 사람이야.' 닉이 홀로 남은 개츠비에게 하는 이 말은 시편 23편 1절의 말을 개츠비에게 상기시켜 주는 말이 아닐까? '야, 원수 앞에 쫄지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저거 별거 아냐. 여호와가 누꼬?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이가, 그분이 네 목자야. 네가 죽으면 그 분도 죽는다. 그 각오로 네 길 인도하시는 분 아이가? 넌 세상 만물 다 합친 것보다 그분에게 가장 존귀한 존재야. 잊지 말그래이.'


친구는 뭘까?

개츠비의 화려한 파티에는 수백 명의 손님들이 몰려들었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단 한 명, 닉 캐러웨이만이 남았다. 이 극명한 대조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친구란 무엇인가? 샴페인이 흐르고 음악이 울려퍼지는 화려한 밤에 함께했던 사람들은 친구였을까, 아니면 단지 소비자들이었을까?


세상이 정의하는 친구는 대개 상호 이익의 관계다. 함께 즐길 때는 있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없고, 성공할 때는 축하해주지만 실패할 때는 멀어지는 관계. 개츠비의 파티 손님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개츠비의 부를 소비했지만 개츠비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꿈을 품고 사는지, 무엇을 아파하는지 알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닉은 달랐다. 그는 개츠비의 성공도 실패도, 화려함도 몰락도 모두 지켜본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개츠비의 마음을 보았다. 데이지를 향한 그 순수하고도 절망적인 사랑을, 5년 동안 한 여인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그 외로운 영혼을, 모든 것을 잃고도 여전히 사랑하려는 그 마음을 보았다. 그래서 닉은 말할 수 있었다. "넌 그 인간들 전부보다 훨씬 가치 있어."


성경에서 말하는 친구의 개념은 더욱 근본적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진정한 친구는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존재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불렀다. 왜냐하면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지만, 친구에게는 모든 것을 알게 했기 때문이다. 개츠비에게 닉이 그런 친구였다. 개츠비의 과거를, 그의 꿈을, 그의 상처를 알았고, 그 모든 것을 품고 함께 견뎌낸 사람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닉이 개츠비의 거짓된 삶의 방식을 알면서도 그를 정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거짓 속에서도 진실을 발견했고, 그 진실을 증언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친구의 모습이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추악함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친구라 부르신다. 우리가 소유가치에 매몰되어 개츠비처럼 살아갈 때도, 우리가 거짓과 위선으로 포장된 삶을 살아갈 때도,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이사야 49:16)라고 하시며,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신다.


결국 진정한 친구는 상대방의 가능성을 본다. 닉이 개츠비에게서 본 것은 그의 화려한 부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었다. 그가 본 것은 사랑하려는 마음, 꿈을 품고 살아가려는 의지, 그리고 그 모든 실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순수함이었다. 마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서 반석 같은 믿음을 미리 보셨던 것처럼, 닉은 개츠비에게서 그 누구보다 귀한 가치를 보았다.


오늘 이 시대에도 개츠비 같은 사람들이 있다. 소유가치에 매몰되어 자신을 소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지워가는 사람들, 화려한 성공의 가면 뒤에서 외로움과 공허함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성취나 소유가 아니라, 진정한 친구다. 그 친구는 성공했을 때만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도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다. 화려한 파티에만 참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쓸쓸한 장례식에도 남아 있어 주는 사람이다. 조건 없이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개츠비는 죽었지만, 닉의 증언을 통해 살아남았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되고 있는가?"


인생질문, '친구는 뭘까?'

세상이 소유가치로 판단할 때, 존재가치를 선포하는 친구. 모든 사람이 떠날 때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 주는 친구.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친구의 모습이며, 우리가 서로에게 되어 주어야 할 친구의 참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묻는다.


나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을까?


이전 04화내가 계속 미워하는 건 나에게 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