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인생질문, '사랑이 뭘까?'
To love another person is to see the face of God.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레미제라블 (Les Misérables, 2012)』
『레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가 60세, 노인이 되어 기록한 것으로 젊은 시절 낭만주의의 기수로 떠올랐던 그는 노년에 이르러 『레미제라블』을 통해 그의 모든 철학과 신념을 집약한 일종의 인생 보고서와 같은 기록이다. 그가 『레미제라블』서문에 "문명이 지옥을 만들어낸 한, 그리고 이 세상에 사회적 저주가 존재하는 한 이런 책들이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록한 것처럼 그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대 속에서 급격하게 식어져 가는 인간의 삶을 향해 자신 나름대로의 처방전을 기록하였고 실제로 『레미제라블』은 인간의 삶을 향한 회복 혹은 돌봄의 처방전이 되어 지금도 읽히고 있다.
아마도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을 읽어봤을 이야기, 장 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집에서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붙잡 한다. 경찰이 그를 끌고 와서 주교에게 도둑질을 고발하지만 주교는 태연하게 "아, 은촛대를 깜빡했군요. 이것도 제가 드린 것에" 라며 장 발장을 끌어안고 이렇게 말한다. "잊지 마시오. 당신은 이 은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주교의 호의를 저버리고 오히려 주교의 물건을 훔쳐 도망친 장 발장, 정직한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은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장 발장과 장 발장이 그렇게 약속하고 살아갈 것이라 믿으며 그를 품어주는 주교의 모습은 글을 읽는 독자에게 질문한다. '과연 이 선택이 누구를 위한 선택이며, 누구에게 유익이 되는 선택일까?'
아마도 위와 같은 질문에 읽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다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고 정의하는 사랑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장 발장을 고발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의 본질과 정의, 가치를 가지고 장 발장과 주교의 대화를 토론한다고 가정해 보자. "자기를 믿어준 사람을 어떻게 저렇게 뒤통수를 치나, 그러니 인생이 저 모양이지. 인생은 불쌍하지만 저렇게 용서하는 것은 오히려 장 발장의 인생을 망치는 일 아닐까?' 또 어떤 이들은 "주교가 보여준 포용과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지. 주교의 저 사랑이라면 장 발장은 언젠가 좋은 사람이 될 거야.' 밤새도록 토론은 이어지겠지만 결론은 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누군가의 의견이 틀리거나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랑이라는 것이 어떠한 정의와 관념, 철학과 이성으로는 설명되거나 토론될 수 없는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기이한 작동의 원리로 존재한다. 사랑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가 아닌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는 새로운 시선이다. 형편없는 존재가 사랑을 받으면 그 기대는 곧 그 사람의 삶이 되어 형편없는 현실을 기대할 만한 미래로 끌고 간다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매우 진부한 표현이지만. "믿어주는 것이 사랑의 시작, 출발선이다."
빅토르 위고는 단순히 소설가가 아니라 19세기의 시각적 신학자였다. 그의 작품들은 일관되게 인간의 타락과 구원, 정의와 자비, 절망과 희망이라는 신학적 주제들을 탐구한다.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는 외모와 내면의 괴리를, 『93년』에서는 혁명과 인도주의의 충돌을, 『레미제라블』에서는 죄와 은혜의 변증법을 다룬다.
그의 작품을 통해 보는 위고의 세계관의 역사는 직선이 아니라 나선이다. 과거의 죄악은 현재를 규정하지만, 현재의 선택이 과거의 의미를 구원한다. 위고가 즐겨 사용하는 대조법적 서사 구조는 단순한 문학적 기법이 아니다. 이는 인간의 영혼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그의 이해를 반영한다. 선과 악은 분리되지 않고, 구원과 타락은 동전의 양면이며, 사랑과 증오는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위고는 이러한 인간 영혼의 복잡성을 문학이라는 매체의 언어로 번역해 낸다.
그래서 늘 위고의 작품은 무겁다. 위고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으로 그는 언제나 날카로운 칼로 우리의 심령을 후 펴 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가 던지는 인생의 질문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주인공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우리와 같이, 나와 같이 상처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장 발장은 사회에서 버림받았고, 판틴은 사랑에서 배신당했으며, 코제트는 어린 시절을 잃었고, 마리우스는 혁명의 좌절을 경험한 것처럼 우리도 장 발장처럼, 판틴처럼 그리고 코제트처럼 거친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초라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고는 이들의 아픔을 절망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상처야말로 구원의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마치 『레미제라블』에서 발장이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는 것은 약점이 아니라 인간성의 증거이며, 그가 새로운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과거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와 함께 살면서도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 독자를 설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묘하게 설득된다. 회개라는 것이 죄로 타락한 모든 인간의 간절한 소망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그 죄 안에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 마치 사도 바울이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며 괴로워하는 그 모습이 선명하게 우리 삶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고는 거침없이 죄인 중에 죄인, 장 발장의 삶을 고발한다. 그리고 그가 왜 죄인이 되었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장 발장이 저지른 범죄의 결과를 설명하는 듯 하지만 그는 그가 죄를 저지르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며 장 발장의 범죄를 정죄하려는 우리를 향해 혹은 사회를 향해 질문한다. "장 발장이 저지른 이 죄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장 발장이 왜 빵을 훔쳤나? 누이의 일곱 아이가 굶주리고 있는 겨울, 일자리를 잃고 절망에 빠진 발장이 빵집 유리창을 깨뜨리고 빵 한 조각을 훔쳤을 뿐이다.(훔쳤을 뿐이라고 표현하겠다.) 그러나 법은 그를 5년간 감옥에 가두고, 탈옥 시도로 인해 결국 19년을 복역하게 만든다. 위고가 기록한 이 부분을 아무리 읽어봐도 장 발장이 저지른 죄에 대해 위고의 분노 혹은 정죄가 나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넌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불공평이다. 위고는 불공평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장 발장 그가 아무리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가 당하는 이 일이 정말 정당한 일인가? 정당하다면 그 정당함은 누가 정의하는가? 도대체 이게 옳은 일, 정의로운 일인가?"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그리고 그 울부짖음은 인생을 향한 분노정도로 끝나지 않고 우리 인생을 향해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불의하다는 것, 부당하고 불합리적이며 불공평하는 것, 그 고통이 필연적이든 우연이든 우리의 인생을 파괴한다는 것 혹은 그 고통이 너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 그렇다면 네가 그것을 인정한다면 너는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으로 내 삶을 짓누르는 고통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쉽게 풀어 말하면 "인생은 이처럼 고통이고 불공평한데, 너는 그 현실을 피할 수 없는데, 너는 그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생각할수록 피하고 싶은 질문이다. 비열한 질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도 오늘을 살아가면서 위고가 던지는 비열한 이 질문을 마주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은가? 범죄 한 행위는 명백하지만 그로 인해 짓밟히는 삶에서, 결국 다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무너진 삶에서, 그리고 기회를 얻는 듯 하지만 다시 주교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현실, 그 참혹한 고통 속에서 너는 그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할 것인가? 위고는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 "답을 모르겠지? 그게 우리 인생, 찢긴 인생이야. 아등바등 도망치려 해도 결국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는 인생, 그게 바로 우리야."
위고는 원위치, 아니 원래부터 그 자리를 맴돌고 있던 장 발장에게 다시 기회를 제공한다. "잊지 마시오. 당신은 이 은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도둑질을 한 장 발장에게 "당신은 정직의 자리로 오게 될 사람입니다."라는 기회 아니 기대를 선물한다. 그리고 장 발장은 비로소 자신의 삶을 짓누르고 있던 과거의 그림자와 평생을 싸우며 살아간다. 비록 자베르는 장 발장을 여전히 추격하고 있고 그는 법적으로 도망자의 신분이지만 장 발장은 자신의 삶을 던져 코제트와 마리우스를 지키고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며 평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 직전 장 발장이 한 고백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그에게 찾아온 기회, 기대를 그가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고백이다.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To love another person is to see the face of God).” 장 발장은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용서와 기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비록 도망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그가 타인을 향한 삶으로 전환되어 살아갈 수 있던 이유는 결국 그가 받은 사랑, 그 사랑을 통해 만난 하나님 때문이라고 위고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세상을 향해 "야, 이런 빌어먹을 세상놈들아, 니들이 버리고 짓밟은 이 장 발장의 삶을 봐라! 그 도망자, 범죄자 장 발장도 결국 용서와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며 살다 그분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고!!"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 중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베드로다. 늘 충동적이었던 사람, 자기 확신에 빠져 칼을 휘두르며 타인의 삶을 찢어놓은 사람,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부인하고 저주했던 사람,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어부의 자리, 일상의 자리로 도피했던 사람, 예수님의 무덤 앞에 설 용기 아니 마음조차 버렸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 아니던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셨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은 애초부터 베드로를 떠나거나 버리신 적이 없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께 지낸 3년의 세월 동안 베드로의 삶이 예수님에 의해 다듬어지고 그 모든 과정을 베드로가 통과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그 베드로, 예수님의 수제자,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훈련되어 우리가 아는 베드로가 된 것 이 아니다. 행동이 앞서는 어리석은 어부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너 이름이 뭐니, 아, 시몬이라고, 그렇구나. 그런데 이제 네 이름은 시몬이 아니라 베드로, 반석이 될 거야."
예수님은 베드로가 무언가 준비된 상태에서 수제자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형편없는 베드로 삶의 현장에 찾아오셔서 이미 반석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쉽게 풀어 말하면 자격 없는 베드로에게 반석이 된다는 자격을 부여하셨다는 의미이다. 베드로가 수제자가 될만한 사랑을 받을만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를 사랑하시고 그로 인해 이 땅 가운데 오시고 그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자신의 삶이 원래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 알려주신 것이다. 너는 반석이 될 거라는 말씀에 사람들은 황당해한다. "반석 같은 소리 하시네. 어부 따위가 무슨, 저렇게 감정이 앞서서야 무슨, 칼을 들고 설치면 다 죽지 뭐, 세 번 부인하고 저주하던 놈이 무슨" 여전히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 형편없는 삶, 마치 현실의 삶을 부정당해버린 장 발장과 비슷하지만 주교가 장 발장에게 준 기회처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여전히 말씀하신다. "너는 반석이 될 거야." 그리고 장 발장처럼 베드로 또한 한없이 초라하고 형편없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자신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기회를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을 것이며 그 결과 베드로는 자신의 삶을 드려 여전히 죄인의 자리에서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흘려보내는 반석의 삶을 살아갔다.
교회 역사에 기록된 베드로의 죽음을 보라. 네로 황제의 핍박에 도시를 떠나 도망칠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질문한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풀어 말하면 예수님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 끝에 베드로는 자신을 죽이려는 로마군인에게 스스로 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반석이 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흔히 사랑을 받는 것을 행복이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행복을 수용(받음)에 두지 않는다. 성경의 행복은 자기중심적 충족에서 나오지 않고, 자기 초월적 드림(줌)에서 비롯된다. 사랑을 주는 순간, 인간은 자기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며, 바로 그때 하나님을 닮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사랑을 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사랑을 주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독생자를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통 역시 같은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세상은 고통을 불행이라 말하지만, 성경은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조건이자, 동시에 사랑을 흘려보낼 기회로 전환시킨다. 고통이 삶을 짓누를 수는 있지만, 그 고통 속에서조차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선택을 할 때, 인간은 비로소 복된 존재가 된다. 그것은 단순히 참아내는 인내가 아니라, 자기 고통을 타인의 위로로 변환하는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장 발장은 불공평한 은촛대 사건을 자신의 구원으로 삼아 평생을 흘려보냈고, 베드로는 수차례의 무너짐 속에서도 “너는 반석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 하나에 붙들려 자신의 생명을 교회와 세상에 내어주었다. 그들의 행복은 결코 ‘받음’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닮아갔다.
그러므로 가장 행복한 인생이란 사랑을 받는 삶이 아니다. 사랑을 주는 삶이다. 풍요로움과 넉넉함이 복이 아니라, 고통조차 새로운 사랑과 용서의 기회로 변환하는 삶, 그것이야말로 성경이 증언하는 복된 삶이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깊이 드러내는 자리, 곧 가장 행복한 인생의 자리이다.
그래서 질문하고 싶다. "당신은 행복한가?" 이 질문을 바꿔 말하면 이런 질문이다.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