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인생질문, '왜 용서해야 할까
Whether he apologized or not, holding on to that anger is just poison to me.
그 사람이 사과했든 말든, 내가 계속 미워하는 건 나한테 독이야.
『A Man Called Otto』(2022)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A Man Called Otto』(2022)는, 누군가에게 사과받지 못한 채 고통과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깊고 아픈 외로움 안에서 살아가는지 그리는 영화다. 주인공 오토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중 사랑하는 아내 소냐를 병으로 잃게 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 오토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지만 영화에서 그는 철저히 외로운 인생으로 그려지며, 감독은 오토의 모든 감정을 '분노'라는 총에 담아 관객을 향해 난사한다. 그리고 분노의 총구는 결국 오토 자신을 향하게 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한의 상황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을 통해서 오토의 삶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사랑받지 못한 인생, 그리고 사랑할 유일한 대상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오토에게도 새로운 출발선에 다시 서게 되는 기회를 영화는 그리고 있다.
결국 인생의 전환점에 선 오토가 고백하는 말이 바로 우리가 오늘 생각해 볼 인생질문의 한 부분이다. 왜 용서해야 할까, 왜 분노에서 벗어나야 할까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오토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사람이 사과했든 말든, 내가 계속 미워하는 건 나한테 독이야."
"Whether he apologized or not, holding on to that anger is just poison to me."
오토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힌 감정의 뿌리를 이제서야 직면하고 고백한다. '분노는 나에게 독이다.' 오토가 이 고백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뇌의 시간을 가져야 했는지 영화는 조용히 그려간다. 오토가 말하는 용서의 정의가 놀랍다. 오토는 용서를 상대방의 사과를 통해 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용서란 무엇인가, 잘못한 사람의 사과를 전제로 하고 있지 않은가? 왜 나라와 나라가, 사람과 사람이, 이념과 이념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서로 사과하라고 하는가? 결국 내 마음의 용서, 울분은 나에게 이런 일을 행한 대상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이 구조를 잘 생각해 보면 용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잘 알게 된다. 생각해 보라. 내가 타인을 용서할 때 타인의 사과가 우선되어야 한다면 결국 나는 용서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가치 있는, 그리고 자신을 죽이는 독에서 건져 내는 그 유일한 수단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꼴이 아니겠는가?
사실 누구나 오토처럼 생각한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내게 사과를 하면 나는 그걸 받을지 안 받을지를 결정하고 용서한다. 이게 대부분 우리가 생각하는 용서의 개념, 메커닉 아닐까? 그런데 오토는 이걸 뒤집는 말을 한다. "내가 그를 미워하는 것, 즉 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나에게 독이야. 나를 죽이는 일이야." 라고 말하면서 오토는 용서의 선택권을 상대방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가져오는 일을 한다.
"용서는 내가 하는 거야. 너의 선택과 행동과 결정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사실 영화의 흐름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매우 일반적인 서사가 반복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자칫 물을 엄청 많이 탄 믹스커피를 숭늉처럼 마시는 알 수 없는 심심함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루하고 뻔한 스토리의 영화를 끝까지 볼 수밖에 없도록 관객을 사로잡는 행크스 형님의 연기는 감동이며, 대략적인 이야기의 전개가 뻔히 보이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중독성 있는 심심함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신과 의사들은 용서는 타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그 사람의 통제에서 해방시키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생각할수록 멋진 말이다. 그 사람의 통제에서 나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이라니. 곱씹어 볼수록 맞는 말이다. 용서를 하지 못하고 분노라는 독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라. 결국 자신이 분노하는 그 대상의 그늘, 그림자에 갇혀 평생을 분노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결국 용서란 내 자존심과 억울함을 끊어내는 일이 아니라, 인간을 짓누르는 모든 고통의 문제로부터 자유로 돌아서는 가장 인간적인 또는 본능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라사인 지방으로 가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귀신 들린 한 명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성경은 귀신 들린 자를 무덤에서 사는 자,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는 자, 온몸에 자해를 하는 자, 벌거벗은 자로 묘사하고 있다. 단순한 질문은 진리를 마주하게 한다. 생각해 보자. 이 귀신 들린 자는 언제부터 여기,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에 살고 있었을까?
(상상해 보자. 마음껏) 어느 날 집안에 한 명이 귀신 들렸다. 갑자기 온몸을 자해하고, 온 동네를 발가벗고 다니고, 밤새도록 괴기한 소리를 내며 소리친다. 부모가 처음에는 온갖 병원에도 다니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자 낙심한다. 그러나 거기서 고통은 끝이 아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들고 일어난 거다. "저런 귀신 들린 사람이 우리 마을에 있으면 우리 마을에 큰 화가 끼친다. 저런 놈은 동네, 마을 밖으로 버려야 한다."
사람들의 분노와 귀신 들린 한 명의 사람의 인생이 충돌하고, 결국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귀신 들린 자를 무덤에 버리기 위해 온 마을 사람은 쇠사슬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집에 문은 그의 가족들이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와 가족과 그리고 사람들에게 버려졌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무덤에 버려진 그는 늘 자신의 몸을 자해하고 있다. 미친 듯 소리치며 무덤 사이를 뛰어다닌다. 돌과 날카로운 쇠로 자신의 몸을 자해한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원망이 그의 마음 가운데 자리잡게 된다. "나를 이렇게 버리다니, 나를 이렇게 쇠사슬에 감아버리다니…"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완전히 치유된다. 귀신은 떠나가고, 온 무덤을 뛰어다니던 그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한 명의 청년이 된다.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들렸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마가복음 5장 15절)
정신이 돌아온 그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버려진 인생, 나를 버린 가족과 마을 사람들, 그리고 나를 치유한 예수 그리스도.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며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요청한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이라면 그의 부탁을 들어줄 것 같은데, 왠걸 예수님은 단칼에 거절하신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한 사람을 예수님이 선을 긋고 거절한 것이다. 이유가 뭘까? 이유는 예수님께서 회복된 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마가복음 5장 18–19절)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귀신을 말씀으로 내쫓는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신다. 무슨 말인가? 네 인생을 괴롭히고 아프게 했던 모든 일이 사라졌으니 이제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더 쉽게 풀어 말하면, 더 이상 마음에 분노를 품고 지나온 일에 상처를 받아 고통 가운데, 독 가운데 살아가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해 가족과 마을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라는 말씀이었다.
만일 그 사람이 예수를 따랐다면, 그가 무덤에 버려지기까지 자신에게 사람들이 했던 모든 일에 대한 독을 갖고 살아갔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났지만, 여전히 마음에는 독이 자리 잡고 있어 분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나를 버린 가족, 나를 버린 마을,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그래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라며 은혜의 삶과 분노의 아픔 가운데 줄을 타며 살아갔을 것이다. 억측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나 또한 은혜와 분노의 사이에서 줄타는 수많은 청소년, 청년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아 삶이 뒤집어지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여전히 분노가 올라오는 아이들, 어머니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청년들, 교회 안에서는 행복하지만 정작 가족으로 돌아가면 분노의 독을 품고 사는 수많은 청소년, 청년들을 보고 있다. 그들에게 은혜가 부족해서라고 말하는 용감하고 무식한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란다. 은혜가 있고 사랑이 가득 차도 분노의 독에 사로잡히면 용서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용서를 상대방이 나에게 한 행동에 대한 사과 혹은 책임을 전제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전제 조건을 채우는 용서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귀신 들린 한 청년이 크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이후, 여전히 마음에 있는 분노의 독을 제거하기 위해선 가족, 마을 사람들을 향한 용서가 필요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정확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지금은 당장 은혜를 받아 괜찮아 보이지만,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분노는 언제든 다시 고개를 쳐들고 치명적인 독으로 귀신 들린 한 청년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필요할까라는 질문이 사실 아이러니한 질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용서는 필요하지. 단, 상대방의 적절한 그리고 명확한 사과가 전제되어야지. 그러나 그런 일은 이전에도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을 충족시키고 납득시킬 만한 사과는 세상에서 거의 만나 볼 수 없는 희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이 희귀한 일에 자신의 삶을 건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 희귀한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대는 평생 분노의 독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죽이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혹은 당돌하게 외치고 싶다.
살고 싶은가? 그러면 용서하라. 왜?
오토의 말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답해주면 이런 말이다.
"그 사람이 사과했든 말든, 내가 계속 미워하는 건 나한테 독이야."
"그 사람이 사과했던 말든, 내가 계속 미워하는 건 나에게 독이야."
잊지 말자.
용서는 구걸하는게 아니라 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