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인생질문, '왜 상처받을까?'
"It’s the scars that make us who we are."
“우리를 만든 건 바로 이 상처들이야.”
『Batman Begins』(2005)
크리스토퍼 놀란이 히어로 영화 배트맨을 연출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다. 당시 영화 평론가 및 대중은 배트맨을 매우 진지하게 다룰 예정이라는 말에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놀란 감독의 실패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트맨 비긴즈 이후에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화 배트맨 다크 나이즈, 배트맨 다크 나이즈 라이즈가 개봉하며 세상은 배트맨을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과 고뇌의 상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 DC가 모조리 말아먹었지만)
『배트맨 비긴즈』영화 후반부로 가면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한 브루스 웨인(주인공)은 여주인공 레이첼 도슨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웨인의 존재를 알고 있던 레이첼은 억만장자의 화려한 옷을 입고 사는 웨인의 모습이 진정한 네가 아니라, 상처에 짓눌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그 두려움의 가면, 얼굴이 너의 진짜 모습이다라고 말해준다. 곱씹어 볼수록 너무 멋진 말이다.
“Bruce, it's not who you are underneath, it's what you do that defines you.”
“브루스, 당신의 진짜 모습은 당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는 행동에 달려 있어요.”
레이첼의 이 말에 웨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리고 고통의 유년시절을 보내고 난 뒤 수많은 상처로 둘러싸인 자신은 여전히 그대로이지만 그 상처라는 가면을 쓰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정체성, 소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멋진 말을 하고 쓩 날아가버린다. “It’s not who I am underneath, but what I do that defines me.” “내 안에 무엇이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나를 정의해.” 의역하면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를 만든 건 바로 이 상처들이야.'
크리스토퍼 놀란은 단순히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아니라 현대의 시각적 철학자다. 그의 작품들은 일관되게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들을 탐구한다. 『메멘토』에서는 기억 없는 존재의 정체성을, 『인셉션』에서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인터스텔라』에서는 시간과 사랑의 차원을, 『테넷』에서는 시간의 가역성과 자유의지를 다룬다. 놀란의 세계관에서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나선이다. 과거는 현재를 규정하지만, 현재의 선택이 과거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놀란이 즐겨 사용하는 비선형적 서사 구조는 단순한 기법적 실험이 아니다. 이는 인간의 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그의 이해를 반영한다. 우리의 기억은 순차적이지 않고, 감정은 논리를 따르지 않으며, 정체성은 고정되지 않는다. 놀란은 이러한 인간 정신의 복잡성을 영화라는 매체의 언어로 번역해 낸다.
사실 놀란의 작품을 보면 불편하다. 놀란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 관심 있게 보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주인공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손상된 존재들이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기억을 잃었고, 『배트맨』의 브루스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인셉션』의 코브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고, 『인터스텔라』의 쿠퍼는 가족을 떠나야 하는 아버지다.
그러나 놀란은 이들의 결핍을 비관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증거라고 말한다. 마치 『배트맨 비긴즈』에서 브루스가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약점이 아니라 인간성의 표지이며 그가 배트맨이 되는 것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려움과 함께 살면서도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관객을 설득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놀란의 연출은 질문에 가깝다. 그는 브루스 웨인이 고통의 터널을 왜 지나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웨인의 부모가 거리의 강도에게 총을 맞아 죽게 되었을 때에도 그 강도의 서사에 그 어떤 비중을 두지 않는다. 마치 내리는 비를 맞는 것처럼 그냥 강도를 당해 부모가 거리에서 죽게 되었다. 얘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고통이 가장 고통스러운 이유는 아마도 이유를 알지 못해서 일 것이다. 왜 인간은 늘 신적인 존재에게 미래와 과거와 현실을 살아가며 질문하게 되는가? 자신에게 오는 수많은 일들이 존재하지만 그 이유와 과정 그리고 결과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놀란의 영화는 그 얘기로 가득 차있다. 웨인이 왜 배트맨이 되었는지 조커가 왜 조커가 되었는지 (나중에 조커를 다룬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그 일을 당하게 내버려 둘 뿐이다.
놀란이 집중하는 것은 왜인지도 알지 못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쉽게 풀어 말하면 '네 삶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나도 몰라. 그리고 관심도 없어.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너는 그 일을 피할 수 없고 그렇다면 너는 무슨 선택을 할 거야?'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이 얼마나 무겁고 피하고 싶은 질문인가, 참 고약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오늘 우리도 놀란이 던지는 고약한 질문을 피할 수 없이 마주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그러한가?
크리스토퍼 놀란이 던지는 고약한 질문은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하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던지시는 다루시는 때론 외면하시는 인생을 찢어놓는 고약한 질문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보자.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 했던 기도는 무엇인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버리셨는지에 대한 외침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자신의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 저주의 형틀에 매달았지만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은 어떠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줄곳 당신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어린양이 되시겠다 하셨지만 예수님 당신께서 왜 그 일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혹은 설명은 없으셨다. 그저 죄인들 앞에 그들의 죄를 대신할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니면 노아의 때처럼 모든 죄를 벌하시고 쓸어버리시는 것인가에 대한 선택에 관한 문제만 남았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브루스 웨인에게 부모의 죽음, 유년시절 공포의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상처와 고통을 통해 브루스 웨인이 무엇을 보게 되었느냐에 대한 것이다. 웨인은 자신의 삶에 쏟아진 모든 상처를 통해 악의 현실을 마주했고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을 보게 되었으며 동시에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웨인에게 주어진 선택은 무엇일까? 첫째, 복수에 사로잡혀 또 다른 악이 되는 것이다. 둘째 절망과 두려움에 짓눌려 무기력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그 상처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눈을 뜨고 정의의 수호자, 배트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영화를 통해 봤듯이 웨인은 상처를 입은 치유자, 소명자로 배트맨의 길을 걸어간다.
결국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삶을 짓누른 상처였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감당하시기로 선택하신 일은 그들의 죽음의 대가를 대신 짊어지는 선택, 일이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아버지를 외치는 깊은 상처에 매몰되는 일이 아니라 그 상처를 모두 끌어안고 십자가에 오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한 결과 더 자세히 풀어 말하면 상처를 통해 선택된 십자가를 통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위대한 선택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 인생에 주어지는 상처는 단순히 개인적 불행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명자로 부르시는 그 어떤 것보다 명확한 부르심, 소명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단순한 적용인가?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볼 수 있다. 고통 가운데 신음한 사람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속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다.
어릴 적 나는 늘 비가 올 때마다 물이 쏟아지는 집에서 살며 잠자기 위해 밥을 먹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한 번은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얼굴을 쓸어오는 물에 잠이 깼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주인집 부엌에서 잠들었다가 내 옆을 지나가는 바퀴벌레를 보며 기겁하고 일어나 통곡하고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내겐 생생하다. 비로 인해 온 집안이 물에 잠기고 모든 물건을 내다 버리고 벽지를 뜯어야 하는 일, 장마철 그 최악의 환경 속에서 숨을 쉬는 일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요 며칠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수해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들을 뉴스를 통해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그들이 겪는 일을 직간접적으로나마 나도 겪은 일, 풀어 말하면 그들의 일은 그들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3절, 4절 말씀을 통해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도다."라고 고백한다. 그 의미는 우리를 위해 버려지고 죽으시고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상처를 아시고 이해하시고 보듬으신다는 말씀일 것이다.
상처란 어떤 면에서 양날의 검이다. 상처로 인해 누군가는 자신을 죽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남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배트맨 시리즈를 모두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배트맨과 조커가 그런 대비를 명확히 보여주는 두 주인공 아닐까? 상처로 인해 누구는 배트맨이 된다. 그러나 누구는 조커가 된다.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상처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발견하여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영웅이 되기도 하고 빌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는 빌런의 길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역설적으로 그 상처와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철저히 그 상처와 마주하여 찢기고 넘어지고 두들겨 맞는 수밖에 없다. 상처는 외면하면 더 큰 아픔으로 우리를 찢어놓지만 대면하고 마주하면 나와 타인을 살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종의 수술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상처와 마주하고 버려지시며 십자가를 통해 우리 삶을 향한 구원을 이루어주신 것처럼 상처는 마주할 때 소명으로 이어지고, 소명으로 이어진 상처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통로가 된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질문해 보자. 도대체 우리 삶에는 왜 이렇게 많은 상처가 있을까? 친구 사이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자식과 부모 사이에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모든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이토록 날카로운 칼, 상처들이 우리를 찢어놓는 것인가? 우리를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고약한 질문인가, 아니면 우리를 살리고 우리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된 모든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회복을 전하기 위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 축복인가?
이지선 교수님은 20대에 정차된 차에 있다가 음주운전 차량과 충돌, 화재로 이어져 온몸이 녹아내리는 화상을 입었다. 그 상처와 원인에 대해 깨닫는 시간을 우리가 감히 어떻게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러나 그녀가 한 인터뷰에서 고백한 말은 이제 그녀에게 화상은 상처가 아닌 또 다른 상처를 치유하는 하나님의 소명, 특별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사고는 당하는 게 아니라 만나는 거예요.'
상처는 우리의 자아를 무너뜨린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환상, 안전할 수 있다는 믿음, 하고자 하는 의지를 꺾어버린다. 그러나 그 상처를 통해 다시 새로운 시작은 일어난다. 아니 그 상처를 통해야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눈이 열리고 오감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에 주시는 소명, 살아갈 이유와 만나게 된다. 브루스 웨인이 죽어야 배트맨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야 (자꾸 배트맨과 예수님을 비교하서 말하다 보니 듣는 분들이 거북할 수는 있겠다. 이해하고 읽어주시길) 우리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듯이, 늘 상처는 우리를 죽이려 하지만 결국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시작과 마주하게 되는
크리스토터 놀란 감독이 주인공 배트맨, 아니 브루스 웨인에게 던진 '너는 어떤 배트맨이 될 것인가?' 질문은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같은 질문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너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그 참혹한 상처 앞에서 너는 무엇을 보고 깨닫고 한 걸음 더 진보할 것인가?' 생각할수록 브루스 웨인의 이 대사는 참 멋지다. "It's not who I am underneath, but what I do that defines me."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우리를 정의한다."
인생에 상처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상처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상처를 받았다고 우리가 부족하거나 어리석은 존재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그저, 상처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고 어떤 발걸음을 내딛는지가 어쩌면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 아닐까?
청소년, 청년 사역을 이제 20년 접어들고 있다. 나를 포함해 우리는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상처받았어.' 특별히 사역의 현장, 교육의 현장에서 나는 때론 공황장애에 시달릴 만큼 많은 상처들을 받았다. 그리고 받고 있다. 이해되지 못함으로 인한 상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상처, 하고 싶지만 능력이 없음에 상처 등 따지고 보면 인생의 모든 일은 다 상처 투성이다. 세상을 보자. 상처 투성이를 넘어 상처 공화국처럼 보이지 않는가? 다들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세상 이곳저곳에서 또 다른 상처를 내면서 서로를 죽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자. 그리고 결정하자. 어차피 우리의 현실 그리고 살아가는 현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풀어 말하면 상처는 늘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새로운 질문이다. 왜 내게 이런 상처가 있는지에 대한 분노, 원망, 좌절과 두려움이 아니라 '도대체 이 상처를 통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일은 무엇인가?'
질문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정답을 얻을 수 없다. 당연한 인생의 이치 아니던가? 그러니 이제 상처 앞에 다시 질문해 보자. '하나님, 내게 이 상처를 통해 무엇을 보게 하시려고 하십니까?' 배트맨의 말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바란다.
"It's the scars that make us who we are."
우리를 만든 건 바로 이 상처들이다.
잊지 말자.
소명의 길은 결국 그 상처의 이정표를 통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