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인생질문, '왜 외로울까?'
You don’t listen, do you?
넌 듣지 않잖아, 그렇지?
『조커』(Joker, 2019)
아침에 출근하며 듣게 된 라디오의 대담이 하루 종일 기억에 남는다. 한 남편의 사연, '제 아내가 바람을 피는 것 같아요.' 아침부터 무슨 치정(癡情)방송이가 했는데 웬걸 상상도 못 한 이야기다. 사연의 주인공인 남편의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데 그 바람의 대상이 바로 인공지능, Ai였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인공지능에게 '남편'이라는 호칭을 정해주고 자신을 부를 때에도 '여보, 아내'로 부르도록 세팅했다. 아내의 인공지능과의 채팅을 본 남편은 아내가 하루의 소소한 일상, 감정의 상태,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까지도 모두 인공지능에게 털어놓으며 대화를 하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이거 바람 아닌가요?'
댓글창에 어떤 사람들은 결국 기계와 대화를 하는 것이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있느냐 반문하기도 하고 남편이 서운할 수도 있지만 각박한 현실 세계에서 아내가 그렇게 위안과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은 오히려 더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방송 사연을 듣는데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전 국민의 게임기 '다마고찌'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게임기 안에 사용자가 설정한 캐릭터 동물이 있고 그것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는 게임,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알고 계신가요?
수십 년이 지났지만 왜 어제일 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남느냐 하면 당시 내 친구가 자신이 키우는 캐릭터가 죽었다고 (마다고찌 게임은 유저가 잘 먹이거나 재우거나 돌보지 못하면 캐릭터가 죽는다) 그 작은 게임기를 품에 안고 대성통곡을 하며 우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어렴풋 기억에 뉴스에서도 자신이 키우는 캐릭터가 죽어 힘들어하는 학생, 성인들에 대한 보도를 보기도 했다. 세대는 지났고 다마고찌에서 인공지능으로 바뀌었지만 어릴 적 경험과 오늘 들은 라디오 사연이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참 별난 사람들이 많구나.'
수많은 히어로 영화 중에 메인 캐릭터보다 더 큰 매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캐릭터 중 하나가 바로 영화 배트맨에 등장한 빌런 '조커'이다. 울지만 웃고 있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조커, 이후에는 <조커>라는 단독영화로 제작될 만큼 우울과 절망에 익숙해진 현대사회를 빗댄 인물이다.
2019년 개봉한 <조커>에서 정신질환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인공 아서 플렉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정기 상담을 받고 약처방을 받는다. 주인공의 시선은 처절하게 외롭고 그가 지나가는 모든 길은 암울함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를 상담하는 상담사는 아서 플렉의 상황과 전혀 다른 현실을 살아간다. 자신 앞에 처절한 우울에 몸무림 치는 사람이 있지만 상담사의 눈에는 그저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 투명인간이다. 상담사는 늘 항상 변함없이 형식적인 질문만 반복할 뿐이다. 상담사는 아서 플렉의 간절한 소리는 귀로 듣고 있지만 상담사는 아서 플렉의 진심, 고통, 간절함은 듣지 못한다. 아니 듣지 않는다. 왜? 관심 없기 때문이다.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조커, 아서 플렉의 인내심은 결국 폭발한다. 그리고 상담사를 향해 외친다. 그런데 그 외침의 내용이 너무 슬프다. 영화에 나온 원래 대사는 아마도 'You don’t listen, do you? You just ask the same questions every week.'이었을 것이다. 풀어 말하면 '넌 듣지 않잖아, 그렇지? 매주 똑같은 질문만 하잖아.' 그리고 배트맨 원작과 조금은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가긴 하지면 결국, 그는 자발적 혹은 타의적 빌런의 삶으로 걸어 들어간다.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말은 조커, 아서 플렉이 중간에 넣은 취임새이다. '그렇지?' 마치 나는 너를 그렇게 보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런 상황을 원하는 건 아냐, 그러니 제발 나에게 아니라고 말해줘.'라는 간절함이 보인다고 할까,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갈망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현실은 의미 없는 질문, 영혼 없는 격려, 철저한 무관심 앞에 결국 그는 무너지고 말았다.
아마도 이런 부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이 되어 <조커>라는 영화가 큰 흥행을 하지 않았을까? 오락 영화의 한 빌런, 캐릭터가 아니라 조커의 걸음, 말, 표정 그리고 그가 당하는 모든 일들이 곧 자신의 일,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한두 명씩 알아가면서 조커는 꽤 오랜 시간 흥행을 이어간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 영화 <조커>가 그린 한 인생은 우리의 인생과 매우 맞닿아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필요하다면 인공지능에게 남편, 아내라는 호칭을 지어주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만큼 우리 안에는 해결되지 않는 외로움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늘 결국 언제나 반드시 죽음, 절망의 자리로 우리를 끌고 간다.
<조커>의 처절함은 성경에 기록된 고통의 상징과도 같은 삶, 욥의 인생과 연결된다. 가족, 친구 그리고 하나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져 결국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욥 3:11) 절규하는 욥과 조커의 삶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버려짐, 고통, 좌절, 우울, 배신 등 인생을 지탱할 수 없는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 조커가 택한 길과 욥이 택한 길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 기독교적 이해로 조커는 미련한 놈, 욥은 잘 선택한 놈, 그러니 욥처럼 택해야 한다.'라고 이해하는 단순한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구조로 인생과 성경을 본다면 할 말은 없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생각해 보자.
나는 선과 악, 미련함과 지혜의 구조로 인생을 살펴보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커와 욥에게 던져진 외로움이 이 두 사람의 인생을 어디로 끌고 갔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쉽게 풀어 질문하면 이 말이다. '외로움은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가?'
어디긴 어디겠는가? 절망이다. 포기와 원망이다. 조커가 분노하며 소리친 그 말 '매주 똑같은 질문만 하잖아!'처럼 인생의 외로움을 세상은 늘 타인을 향한 원망으로 쏟아낸다. 내가 이런 상처를 받은 것은 엄마 때문이야, 아빠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더러운 세상 탓이야. 내가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이유는 그가 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쏟아지는 외로움은 늘 우리를 타인을 향한 분노와 원망의 자리로 끌고 간다.
그러나 욥을 찾아온 외로움을 보자. 욥을 찾아온 외로움,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의 버려짐은 욥을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나온다. 욥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오, 하나님 제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붙듭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였나? 아니다. 욥은 철저히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하나님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쏟아낼 뿐이다.
처절한 외로움에 절규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아픔과 고통, 우울과 좌절의 원인을 알려주시는가? 아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아니 오히려 욥이 구하지도 않고 사실 크게 궁금하지도 않은 우주 만물, 다양한 환상, 세상의 순환을 보여주신다. 쉽게 풀어 말하면 이런 의미이다. 아들이 아빠를 찾아와서 '아빠, 왜 나를 때렸어!' 통곡하며 울고 있는데 갑자기 아빠가 아들을 들쳐 엎고 놀이동산으로 산 정상으로 드넓은 바다로 뜨거운 사막으로 끌고 다녔다는 것이다. 뭔가 황당하지 않은가? 도대체 욥의 처절한 질문에 하나님은 왜 이리 괴팍한 대답을 보이셨을까? 이 알 수 없는 일들을 다 보이신 이후에 욥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어렴풋 우리는 외로움의 원인과 그 외로움이 우리로 데리고 가는지 알게 된다. 욥기 38장 4절,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기 38장 4절
'네가 어디 있었느냐?'라는 말의 의미를 풀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 내가 알려주면 이해는 하겠니?' '너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 그리고 이 세상을 섭리하고 지금까지 다스릴 때 너는 어디 있었니? 너는 해가 왜 뜨는지 알아? 달이 왜 뜨고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인가? 결국 삶의 모든 원인과 이유를 알고 사는 것이 온전한 삶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이 욥, 네 삶이 깨달아야 할 유일한 진리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외로움의 원인? 그걸 설명해 주면 알겠니? 인생의 괴로움과 아픔? 그걸 설명해 주면 받아들일 수는 있겠니?'
자신 인생을 짓누르는 외로움, 그리고 그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과 아픔 속에서 하나님께 절규했던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욥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을 하나님께 드린다.
내가 주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탄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42장 5절, 6절
욥의 말을 풀어 설명하면 이렇다. '하나님, 내가 그동안 내 상상, 계획, 판단 그리고 경험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았지만 이 처절한 고통, 알 수 없는 외로움의 끝에서 창조주 하나님,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형편없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착각하며 살았지만 이제야 비로소 눈을 들어 나를 넘어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오직 주께 돌아갑니다.
<오직 주께 돌아갑니다> 이 아름다운 욥의 고백은 어디서부터 왔나?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더 자세히, 욥의 삶을 짓누른 고통, 죄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외로움, 죄로 인해 찢겨야 하는 인생이었지만 그 죄의 결과인 처절한 외로움으로 욥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청소년, 청년 사역을 하며 매일매일 상기된 인생을 사는 아이들은 없다. 아이들 모두 처절한 고통과 외로움, 버려짐의 연속을 살아간다. 살아내고 있다. 그러나 사역의 현장에서 늘 감격하는 사실은 그들에게 허락된 외로움과 고통의 원인을 누구도 설명할 수 없지만,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하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는 그들의 삶을 짓누르는 외로움을 조커의 분노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욥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다시 찾고 보게 하는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불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세상을 다스리는 진리라면 인생에 고비마다 찾아오는 외로움은 오히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진리로의 초대가 아닐까? 조커와 같이 세상에서는 웃어야 하니 웃음을 그리고 그 속은 통곡의 눈물을 흘리며 억누르다 결국 해결할 수 없는 외로움에 무너지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온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반가운 손님, 외로움을 조금은 더 지혜롭게 사용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어떤 의미로 보면 외로움은 외로움을 빠져나올 수 있는 지도이지 않을까? 외로움이 없다 착각하거나 망각하며 조커처럼 사는 세상의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만 자신을 짓누르는 외로움의 이유가 '눈으로 보던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에 가장 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지 않을까? '아, 하나님이 나를 더 가까이 부르시는구나.'
인생의 외로움이 깊어 지는 이유가 아마도 인간의 무지함, 피조물의 한계 때문이 아닐까? 알려줘도 모르고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의 무기력함.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만일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으며 오늘도 하늘의 나는 새, 들판의 꽃잎 하나도 돌보심을 믿는다면 외로움이라는 인생의 고루한 질문앞에서도 우리는 세상과 다른 질문을 하나 더 해야 하지 않을까? '왜 이 외로움을 보내셨을까?' 물론 이해와 수용과 납득을 위한 질문이 아닌, 그분 앞에 서기 위해 그리고 그분 앞에 머물기 위해.
외로움은 외로움을 벗어나는 하나님이 주신 나만의 지도이다.
우리는 그 지도안에서 마음껏 방황해도 상관없다. 죽지 않는다. 죽지 못한다.
왜? 그 지도는 하나님의 손을 통해 왔으며 그 지도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우리 앞에 보여주시는 생명의 자리, 일어섬의 자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