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인생질문, '쉼이 뭘까?'
Crying helps me slow down and obsess over the weight of life’s problems.
울음은 나를 진정시키고, 인생의 문제들을 곱씹게 해줘.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2015)
방학을 하고 약 2주, 제주도 살이를 하게 되었다. 서귀포 한적한 시골마을 깊숙한 숲 속에 덩그러니 있는 하얀 집은 '아, 여기서 2주 동안 살아야겠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고 한번 마음을 정하고 나니 어느새 Airbnb 숙소 예약을 마친 상태였다. 그렇게 나는 쉼을 찾아 제주로 떠났다.
여름, 겨울 방학기간에는 외부 사역을 나간다. 올해에도 6월 방학 이후 8월 개학 전까지 교사들을 위한 강의, 부모들을 위한 강의, 그리고 청소년 청년들을 위한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자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불러주는 부모, 교사, 청소년 및 청년들이 있다는 것은 목회자로 가장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유독 수련회 및 강의 주제가 '쉼'과 관련된 요청들이 많다. '부모들이 일상에 지쳤어요. 성경적으로 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씀을 나눠주세요.' '우리 애들이 공부하느라 지쳤어요.' '우리 청년들이 취업과 일상에 너무 지쳤어요.' 이번 여름에도 '공동체와 쉼, 공동체를 통한 쉼'등의 주제로 강의, 설교 요청이 쌓여있다. 다들 정신없이 제주도 숙소 예약을 했던 나처럼 쉼이 필요한가 보다.
만일 누군가 지친 일상의 삶을 잠시 뒤로하고 제주도 혹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또는 자신을 위로하고 만족시키는 환경으로 떠나는 것을 쉼이라고 한다면 제주도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되는 나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쉼이란 환경적인 변화를 준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짧은 여행을 통해 깨달았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사실 늘 깨닫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자리에서 잠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을 쉼으로 착각하면 일상과 쉼의 간극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일상의 자리는 2주 동안 제주도 산 중턱의 어떤 집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 매일매일 반복되는 하루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단 2주, 아니 1주라도 쉼이 있어야 치열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인생에는 워라밸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인생의 가치를 치열함과 쉼의 적절한 균형 혹은 긴장상태로 이해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이것에 대한 바른 이해는 사람, 인간의 존재 가치에 대한 질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를 풀어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삼위,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것과 같이 인간 내면, 인간이 존재 가치에도 그것이 투영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중학생이 들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이것을 풀어 말하면 모든 인간은 관계적인 것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하며, 그 관계성을 통해 힘을 얻고 살아갈 목적과 방향과 이유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고립된 오늘날 사회를 보라. 왜 인간은 따돌림, 이해받지 못함에 대해 상심하고 아파하며 때론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관계에 매여 살아가는가?
강아지는 왕따를 당한다고 (그럴 일도 없겠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 들판의 꽃들은 다른 꽃들이 자신과 얘기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말라죽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생명 가운데 오직, 유독 인간만이 관계에 대한 목마름과 그 관계를 통해 인생의 목적,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한다. 왜 그럴까? 성경은 그 이유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나는 그것을 믿는다. 왜? 내가 늘 그런 관계성에 대한 나 자신의 자아를 확인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지 아니한가?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신을 섬기는 아합왕의 대군과 맞서 홀연단신 전쟁터에 나아가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인물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 엘리야가 수백의 군대를 한순간에 물리친 것이다. 그리고 이 승리의 결과를 아합왕 아내 이세벨이 듣게 되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처럼 만들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열왕기상 19:2
사실 이세벨의 말은 황당한 말이다. 엘리야의 대승으로 이세벨은 엘리야와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풀어 말하면 엘리야를 향한 이세벨의 말은 그저 말, 아무런 힘도 없는 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엘리야는 이세벨의 이 말을 듣고 좌절한다.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선지자, 위대한 전쟁의 승리를 거둔 엘리야는 결국 이세벨의 협박에 두려워 도망치고 스스로 죽기를 자처하는 자리까지 떨어지게 된다. 왜 엘리야는 아무런 가치도 힘도 실력도 없는 이세벨의 말에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만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엘리야를 대하시는 하나님을 보면 알 수 있다. 죽겠다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밥을 먹이시는 일이었다. '엘리야, 이리 와 밥 먹어.' 하나님이 하신 일은 또 무엇인가? '엘리야, 이리 와서 한숨자.'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하신 일은 밥을 먹이고 평안히 잠을 잘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풀어 말하면 너를 먹이고 재우는 사람, 너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존재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엘리야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알게 하시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이런 의미이지 않을까? '엘리야, 여전히 나는 너와 함께 하고 있어.'
자신 주변에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했을 때 엘리야는 스스로 죽기를 자청했다. 그러나 그런 엘리야를 하나님은 먹이시고 입히시며 쉼, 휴식, 회복을 허락하셨다. 스스로 혼자 서야 한다고 했을 때 엘리야는 죽기로 결심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엘리야가 숨 쉴 수 있도록, 먹을 수 있도록, 잘 수 있도록 세상이 줄 수 없는 완전한 쉼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결국 쉼은 무엇인가? 내가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을 통해 누리는 결과이다. 스스로 혼자 서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엘리야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사이트 아웃의 대사로 풀어 말하면 우리가 스스로 설 수 있다 여기며 환경을 바꾸고 상황을 바꾸는 것으로 쉼을 얻으려고 한다면 울음은 우리를 죽이게 되고, 인생을 포기하게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를 먹이신 재우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오늘도 여전히 거친 인생을 살아가며 버거움에 허덕이고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의 울음은 나를 진정시킬 것이고, 우리 인생의 문제들을 곱씹게 함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완전한 쉼, 유일한 쉼에 우리 삶을 머물게 할 것이다.
제주도에서 보낸 이주의 삶, 행복했을까? 당연히 행복하지. 그러나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생각났다. 사랑하는 아내, 보고 싶은 가족들, 그리고 정돈되지 않은 나의 방. 결국 나는 이주동안 아니 이주만에 제주도에서 올라왔다.
쉼은 환경과 상황이 주는 게 아니다. 쉼은 나의 결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쉼이란 관계이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치열한 세상 속에서도
맛있게 먹고 평안하게 자고 내일을 향한 소망을 품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