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잘못이 아니야.

일곱번째 인생질문 '나는 누구인가?'

by 인생질문

“It’s not your fault.”

"네 잘못이 아니야."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 1997)』


나는 누구인가?

며칠 전 핸드폰을 아이폰14에서 아이폰16 프로로 바꿨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맛에 심취하고 있다. 그냥 지나가다 쓰윽 꺼내 찍은 사진 하나가 작품이 되는 마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아이폰17이 곧 출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폰16 프로 가장 최고의 사양을 가지고 있던 나는 불과 며칠 사이에 신모델을 앞두고 재고 떨이로 던져진 아이폰16 프로 막차를 탄 호구가 되었다.


사실 누군가 호구라고 해도 크게 신경 쓰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이전 아이폰14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신기술의 쾌감을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쾌감도 언젠간 곧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불과 몇 년 전 아이폰14를 처음 손에 쥐었을 때 그때에도 아마 지금과 비슷한 감정과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제품(Product)이 주는 만족의 한계가 바로 이것이다. 받았을 때 주는 쾌감은 새로운 제품이 나오는 동시에 사라진다. 왜냐하면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는 동시에 이전 제품은 구모델, 단종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나는 음악을 모르지만 내가 들어도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 있다. '선생님, 베토벤 음악이 좋은 거예요? 모차르트 음악이 좋은 거예요?' 당신은 누구의 음악이 더 좋은 음악이라 생각하는가? 사실 이 질문은 음악에 대한 무지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이다. 왜? 세상 어느 누구도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비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들이 세상에 내놓은 음악은 제품(Product)이 아닌 작품(Masterpiece)이기 때문이다.


제품과 작품의 차이는 무엇인가? 제품은 공장에서 찍어낸다. 작품은 장인이 삶을 갈아넣어 유일하게 존재한다.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은 시간이 지나면 폐기 처분되고 단종되어 사라진다. 그러나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높아진다. 왜냐하면 세상에 유일한 존재, 작품(Masterpiece)이기 때문이며 누군가 그것을 모방하는 순간 그것은 심각한 범죄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방조차 해서는 안 되는 유일한 가치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을 제품이 아닌 작품(Masterpiece)으로 정의한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에 유일하며 독보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이다. 나라는 존재를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으며 누군가 그런 일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범죄로 여겨질 만큼 나라는 존재, 인간은 세상에 유일한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모든 인간은 날마다 이것을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본성 안에 살아간다. 쉽게 풀어 말하면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 작품에 대한 환호가 없는 삶을 살아갈 때 모든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파괴적인 존재로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악의 축이 되어버린다.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는 심리학에서는 이런 인간의 본성을 자기 확증(self-affirmation)이라고 정의하는데 자기 확증을 강화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가치를 재능(Talent)이라고 말한다. 쉽게 풀어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각각의 재능이 있는데 이것을 개인과 공동체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용할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어린아이들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가 된다. 이제 막 말을 하는 아이가 엉거주춤 움직이며 춤을 추고 그것을 보는 모든 가족들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으로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스킨십을 통해 사랑과 격려와 감동의 감정을 전달하면 아이는 그런 총체적인 교감을 통해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작품이라고 인식하게 된다는 뜻이다. 반대로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안타깝게도 스스로의 삶을 작품이 아닌 제품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으로 왜 온전한 사랑을 누리지 못한 인생들이 세상의 기준에 그토록 목을 매어 자신의 삶을 소비하고 사는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결국 세상에서 버려지지 않을 제품이 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발버둥이 아닐까.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재능이라는 것이 단지 자신의 삶에 대한 효능감,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의 통로가 아닌 하나님과 공동체를 향해 헌신하고 소비하고 내어주는 도구를 목적으로 고린도전서 12장 7절의 말씀과 같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풀어 말하면 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그 재능을 나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죄는 위와 같은 나의 삶에 허락된 재능과 유일한 작품이라는 우리 인생의 가치를 파괴하며 왜곡시킨다. 재능을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의 만족과 성공을 위해 사용하게 하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로 자신을 속임으로 결국 끊임없는 투쟁 혹은 사라지지 않는 열등감 안에 갇혀 살아가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결국 작품이었던 우리의 삶을 제품으로 끌고 내려간다.


『굿 윌 헌팅』의 주인공 윌(맷 데이먼)은 MIT 청소부이다. 그러나 그는 세계 최고의 학자들도 놀랄 만큼 수학적 재능이 탁월한 인물이다. 그리고 청소부의 삶을 살아가는 수학 천재는 모든 석학들이 부러워할 만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숨겨둔다. 윌의 삶은 모순적이다. 그는 청소부로 일하며 낮에는 칠판에 적힌 난제의 문제를 풀고 사라지는 익명의 청소부로, 밤에는 친구들과 술집을 전전하며 시비와 싸움을 거는 거리의 부랑인으로 살아간다.


수포자의 삶을 살아온 나는 윌의 모습이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윌은 자신의 인생을 제품이 아닌 작품으로 멋지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재능을 드러내지 않을까?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 왜 향기로운 인생, 유일한 작품의 삶을 살아갈 생각조차 하지 못할까? 영화를 보는 내내 윌로 빙의가 되어 생각해도 그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나라면 안 그랬을 텐데…'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결국 그 질문은 윌의 삶을 통해 보게 된다. 윌의 삶이 상처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버려진 고아, 학대와 폭력의 낙인은 작품이었던 그의 삶을 제품, 단종되어 폐기된 제품의 인생으로 바꿔놓았다. 그가 왜 도망치는 삶을 살기로 결정했을까? 결국 나는 언제든 버려질 수 있으며, 언젠가는 버려질 것이라는 경험을 통한 확신 안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도망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윌은 그런 자기 확신 속에서 의도적으로 더 낮은 자리에 머무른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기를 바라는 동굴의 마음과 난제의 문제를 풀어가는 재능의 삶을 애써 지워가며 숨는다. 왜, 기대하지 않으면 결국 상처받을 일이 없다 여기기 때문이다.


『굿 윌 헌팅』은 미소년 맷 데이먼이 보여주는 "천재 소년의 성공기"라고 하기엔 윌이 보여주는 삶의 굴곡과 그로 인해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매우 무거운 영화이다. 영화 속에 윌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천재인가? 나는 상처받고 버려진 존재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는 작품이지만 스스로를 제품으로 인식하고 있는 한 인생이 우리에게 물어보는 질문이기도 하다. "너는 누구니?" "너는 어떤 존재야?" "넌 왜 사니?" "너는 왜 아프니?" "너는 왜 우울하니?" "도대체 너는 왜 슬퍼하고 포기하고 좌절하고 숨어사니?"


윌이 내린 나름대로의 결론은 무엇인가? 결국 윌이라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아닌 자신이 겪은 상처를 통해 규정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면 윌은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상처를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 상처를 덮고 자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숨기려 한다. 윌이 매일 밤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 물어도 자신에게 돌려주는 답은 늘 같다. "상처 입은 존재, 기대하면 안 되는 존재, 그러니 숨어 있어야 하는 존재"


유일한 존재

숨어 있는 윌에게 숀(로빈 윌리엄스)이 찾아온다. 그러나 윌의 태도는 우리의 예상과 같다. 숀을 향해 조롱과 비난, 숀의 약점을 들춰내며 그를 떼어낼 생각뿐이다. 윌에게는 이런 일이 익숙하다. 수많은 상담가들이 윌을 도우려 찾아왔지만, 윌은 늘 이렇게 날카로운 칼로 상대방을 찔러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숀은 윌을 떠나지 않는다. 윌이 왜 이토록 파괴적인 도망자의 삶이 되었는지, 윌 내면의 깊은 상처를 숀은 직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숀은 도망치는 윌의 삶을 끌어안고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보스턴 호수 한 벤치에서 윌과 숀의 대화가 시작된다. 여전히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도망치고 나 자신을 숀에게 그리고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윌에게 숀은 윌이 생각하지도 못한 말을 꺼낸다.


"넌 책으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어. 그러나 삶은 알지 못하지."


재능과 지식은 많지만, 사랑의 상실로 인한 깊은 상처, 그로 인해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해 숨어버린 윌을 단번에 찾아내는 말이었다. 인생을 책으로 배워 모든 것을 스스로 다 안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윌 너는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인생이라는 의미로 풀어 말하면 이런 말이다. "윌, 네가 왜 숨는지 알아? 네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야. 네가 삶을 알아?" 직설적으로 말하면 이런 말 아닐까? "네가 작품인 건 알아?"


여기서 대화가 멈췄다면 윌은 자신의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숀을 밀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숀은 여전히 두려워 떨며 도망치려는 윌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반복해서 건넨다. “It’s not your fault.” “네 잘못이 아니야.”


자신의 모습이 들켜서일까? 처음에는 방어하며 비웃던 윌, 그러나 반복된 숀의 말에 윌은 결국 무너져 내린다. 아니, 도망치려는 의지가 꺾여버린다. 그리고 무너져 눈물을 터뜨린다. 결국 그 말 한마디였다. 네가 겪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네 잘못이 아니라는 것, 네가 겪은 그 무시무시한 상처의 원인은 네가 아니라는 것. 숀의 말에 무너져 눈물 흘리는 윌을 보며 생각해 본다. "도대체 윌이 만난 수많은 상담가들은 왜 윌이 듣고 싶어 했던 그 말 한마디를 해주지 못했을까? 원인은 분석하고 그 원인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솔루션은 제공하면서도 정작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은 결국 상대방뿐만 아니라 윌에게도 있다는 그들의 인식을 윌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아

한 여인이 간음을 했다. 율법에 의해 사람들은 그녀를 성문 앞으로 끌고 와 돌을 들어 그녀의 추악한 범죄를 다 드러내 수치를 주고 돌을 들어 죽이려 한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 앞에 찾아오셨다. 그리고 돌을 들어 그녀를 죽이려는 자들을 향해 바닥에 무언가 쓰신 이후에 "죄 없는 자들은 이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라"는 말씀을 하시고, 돌을 들었던 사람들은 결국 다 돌아간다.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돌을 든 자들이 볼 수 있는 바닥에 뭐라고 쓰셨을까? 사람들이 예수님의 어떤 글을 봤기에 여인을 향한 정죄의 분노를 거두게 되었을까?


아쉽게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예수님께서 바닥에 기록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돌아간 이후 두려워 떨고 있는 여인을 향해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장 10-11절)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죄가 없기 때문에 정죄하지 않는다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 여인은 분명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죄로 인해 끌려온 죄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죄하지 않으시겠다 결정하셨다. 원어 성경 의미 그대로 보면 "네게 죄를 다시 묻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여인에게 법적인 완전한 용서를 허락하시며 동시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거룩한 부르심으로 초대하신다.


『굿 윌 헌팅』에 나왔던 고구마 열 개를 먹은 것처럼 나를 불편하게 했던 수많은 상담가들의 관점으로 여인을 대하면 이렇다. "간음은 죄입니다. 이 죄는 이런 결핍에서 비롯됩니다. 이 죄를 극복하기 위해선 이런 이런 일들, 검사, 이런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노력하지 않고 이 어려움을 벗어나지 않으려면 결국 늘 이렇게 똑같은 죄를 반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자.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이 말의 모순이 뭔지 아는가? 너의 죄와 나는 상관이 없다는 말, 너의 현실과 나의 현실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네게도 있으며 네 삶의 수고와 노력, 결국 너의 의지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출발선이라는 말이다. 이게 맞는 말일까?


깊은 상처를 받은 존재,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작품이 아닌 제품으로 여기는 아이들에게 위와 같이 말한다면 아이들은 그 이후 마음을 닫고 살아갈 것이다. 차라리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것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로 보면 놀라운 예수님의 모습이다. 명백한 간음의 죄, 범죄한 여인을 대하시는 태도를 보라. "너 왜 그랬니?" 한 번쯤은 물어보실 법한데 예수님은 간음의 죄를 짓고 그 죄가 반복되어 결국 율법에 의해 죽음의 자리까지 끌려온 막장의 인생을 살아온 여인에게 단 하나의 질문도 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태도에 반감이 생기기도 한다. "예수님, 죄를 용서하시는 것도 좋지만 저 여인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좀 해주셔야지. 이렇게 대충 퉁치고 넘어가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저 여인처럼 간음하는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여기겠어요? 누가 이렇게 하면 율법을 지키겠어요?" 아마 이런 반감이 쌓여 예수님을 끌어내리려는 사람들, 사회, 문화, 철학, 이념들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다시 예수님을 보자.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죄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신다. 정확히 말하면 죄가 없다 여기신 게 아니라 죄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왜 그랬을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자리로 끌려나온 여인이 누구보다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고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아서가 아닐까?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언급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죄하지 않으신다 말씀하신다. 그리고 거룩한 삶으로 초대하고 부르신다. 결국 평생 제품의 삶을 살아가며 삶, 성, 인생을 낭비하던 한 여인의 삶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유일한 존재, 작품의 삶으로 불러주시는 것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여인의 심정을 상상해 보자. "아싸, 내가 한 죄가 안 걸렸구나"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그 여인은 철저히 예수님의 말씀에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바닥에 쓴 글씨를 통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손에서 돌을 내려놓게 하신 분이 지금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용서하시고 거룩한 삶으로 초대하시는 것을 보며, 간음한 여인은 자신의 존재를 그때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몸을 파는 여인이다. 사랑이 아닌 쾌락을 좇던 여인이다. 사랑받을 수 있다면 몸을 팔아도 괜찮았던 여인이다. 내가 더 사랑받기 위해서는 몸을 더 적극적으로 파는 일밖에 없던 여인이다."


그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한 가지 생각,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너는 정말 그런 사람이니? 너는 정말 그런 존재일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네 삶을 정말 그렇게 창조하셨을까? 세상에 차고 넘치는 제품, 시간 지나면 폐기 처분되는 제품, 다른 제품보다 우월하지 않으면 버려지는 제품으로 창조하셨을까?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넌 누구니? 넌 도대체 누구니?"


네 잘못이 아냐

숀이 윌에게 한 말은 사실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도 사실이 아니다. 윌에게도, 간음한 여인에게도 변명할 수 없는 잘못, 죄가 있다. 아무리 상처가 크고 결핍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한 말, 행동, 삶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분명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숀은,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잘못을 묻지 않으신다.


아무런 잘못을 묻지 않으신다는 말이 오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그러면 윌에게, 또 그 여인에게 임한 것처럼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이뤄지는 것이냐는 반박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적 차원에서의 설명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숀이 윌에게 했던 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셨던 그 말은 날마다 내가, 우리가 듣고 있는 예수님의 음성이니 말이다.예수님은 늘 한결같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상처가 너를 규정하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네가 그 아픔 속에 갇혀 살아가도록 방치하지 않을 거야."
"네가 그 간음의 참혹한 죄에 사로잡혀 죽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때론 사람들의 합리적인 반박과 세상의 논리 앞에서도 나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


도대체 왜일까? 성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너는 나니까." (에베소서 2장 10절) 다른 말로 풀어 말하면, 너는 내가 만물을 창조할 때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나를 따라 창조한 유일한 존재,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런 의미 아닐까?


"네 잘못의 문제는 네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야."
"네 아픔의 문제는 네 아픔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나의 문제야."


생각해 보자. 윌이 언제 도망자의 삶이 아니라 회복을 통해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나? 숀을 만났을 때이다. 정확히 말해 숀이 "윌, 너의 문제는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야"라고 보여주었던, 푸근하게 품어주는 아버지 같은 사랑을 경험했을 때부터가 아니던가?


인생질문 '나는 누구인가?'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이 언제 도망자의 삶을 벗어나 스스로를 제품으로 여기며 죽을 때까지 경쟁하는 삶을 벗어나, 세상에 유일한 가치, 존귀한 존재, 작품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때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이렇게 물으실 때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어? 넌 제품이야? 아니면 작품이야?"


이전 06화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