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는 진짜였어. 그래서 보는 재미가 있었지

여덟 번째 인생질문, 나로 산다는 건 뭘까?

by 인생질문

"You were real. That's what made you so good to watch."

"자네는 진짜였어. 그래서 보는 재미가 있었지."

『트루먼 쇼 (The Truman Show, 1998)』



나로 산다는 건 뭘까?

얼마 전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 데이터를 분석하다가 문득 서늘함을 느꼈다. 알고리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다. 내가 어떤 영상을 좋아하는지, 언제 접속하는지, 심지어 내 정치적 성향이나 소비 패턴까지 기가 막히게 파악해서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상'이라며 화면 가득 띄워준다. 편리함에 감탄하다가도 묘한 거부감이 든다. 데이터 쪼가리가 규정하는 취향과 패턴의 집합체, 과연 그게 '나'일까?


이런 고민은 학교와 교회 현장에서도 이어진다. 아이들에게 "너는 꿈이 뭐니?"라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직업 명사를 댄다. "의사요, 유튜버요, 건물주요."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으로 규정되는 것에 익숙하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직함과 소속으로 서로의 견적을 낸다. 그 명함을 떼고 나면, 우리는 과연 누구일까?


많은 이들이 '나답게 산다'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혹은 남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독특한 개성을 뽐내는 것으로 착각한다. 욜로(YOLO)를 외치며 소비하거나, 반대로 자연인처럼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자아 실현이라 믿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진짜가 되는 문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는 태어날 때부터 거대한 세트장 안에서 살았다. 그의 부모, 친구, 아내, 이웃 모든 것이 가짜였고, 그의 삶은 24시간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그는 '트루먼 쇼'라는 거대한 상품의 주인공, 즉 가장 잘 팔리는 제품이었다.


영화 후반부, 트루먼은 자신의 세상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숨을 건 항해 끝에 세트장의 끝, 가짜 하늘이 그려진 벽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비상구 문을 발견한다.


그때, 쇼의 창조자이자 연출가인 크리스토프가 하늘에서 목소리로 회유한다. "바깥세상은 위험해. 내가 만든 이 세상은 안전하고 완벽해. 너는 여기서 스타야."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압권이다. "You were real. That's what made you so good to watch." (자네는 진짜였어. 그래서 보는 재미가 있었지.)


크리스토프의 말은 모순이다. 트루먼은 진짜였지만, 그의 삶은 가짜였다. 트루먼이 세트장 안에서 보여준 웃음과 눈물은 진짜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의도와 각본에 의해 통제된 '전시된 자아'였기 때문이다. 풀어 말하면, 트루먼은 그 안에서 철저히 소비되는 객체였다.


트루먼은 카메라를 향해, 그리고 창조자 크리스토프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망설임 없이 어두운 문밖, 진짜 현실로 걸어 나간다. 그가 선택한 '나로 산다는 것'은 안전하고 익숙한 가짜 세트장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거칠고 위험하더라도 통제되지 않는 '나'로서 세상과 마주하는 것이었다.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성경 속 모세의 이야기를 보자. 그는 이집트 왕자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가지고 40년을 살았고, 살인자가 되어 도망친 광야에서 양치기라는 초라한 타이틀로 40년을 살았다. 왕자 모세도, 양치기 모세도 그의 겉모습일 뿐이었다. 80세 노인이 된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내 백성을 구하라"고 했을 때, 모세는 끊임없이 거절하며 묻는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출애굽기 3:11)".


이 질문은 모세의 처절한 자아 성찰이다. "나는 실패자입니다. 나는 살인자입니다. 나는 늙은이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처지, 즉 세상이 매긴 성적표로 자신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대답이다. 하나님은 "너는 왕년의 왕자잖아"라거나 "너는 숨겨진 잠재력이 있어"라고 그의 자존감을 세워주지 않으셨다. 대신 동문서답처럼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풀어 말하면 이런 뜻이다. "모세야, 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야. 너의 정체성은 네 스펙이나 과거의 실수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나(하나님)와의 관계에서 오는 거야."


우리는 자꾸 내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어 나를 증명하려 한다. 남들과 다른 재능, 남들보다 나은 연봉, 더 좋은 집으로 나를 포장해야 '나다운 삶'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트루먼 쇼' 세트장을 짓는 일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세트장 말이다.


진정한 '나'는 내가 무엇을 소유했느냐나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느냐에서 결정된다. 트루먼이 세트장을 박차고 나갈 수 있었던 용기는 가짜 관계를 끊고, 비록 불확실하지만 '진짜 세상'과의 관계를 맺겠다는 결단에서 나왔다.


제품이 아니라 시(Poem)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제품으로 취급한다. 신상 아이폰이 나오면 구형이 폐기되듯, 더 젊고 유능한 인력이 나오면 우리는 대체될까 봐 두려워한다.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은 비교당하고, 경쟁하고, 결국 소모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부른다(엡 2:10). 여기서 '작품'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포이에마(Poiema)', 즉 '시(Poem)'라는 뜻이다.


시는 효율성을 따지지 않는다. 시는 다른 시와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그 자체로 고유한 운율과 의미를 가진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비교하는 게 어리석은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서사를 가진다.


나로 산다는 건, 남들이 만들어놓은 대본대로 연기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실패, 찌질함, 상처까지도 숨기지 않고 내 인생이라는 시의 한 구절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트루먼이 가짜 하늘을 찢고 나갔듯, 타인의 시선과 인정이라는 세트장을 찢고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지으신 분 앞에서,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당당하게 서는 것이다.


인생질문, '나로 산다는 건 뭘까?'

나로 산다는 건, 완벽한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배역을 거절할 용기를 내는 것이다. 내 인생의 연출권이 세상이 아닌, 나를 지으신 분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카메라 앵글 밖의 삶이 거칠고 투박할지라도, 그것이 '진짜'이기에, 오늘도 뚜벅뚜벅 그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진짜로 살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니 쫄지 말자. 당신은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유일한 시(Poe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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