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인생질문, '잘산다는 건 뭘까?'
"We're all traveling through time together, every day of our lives. All we can do is do our best to relish this remarkable ride."
"우리는 모두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훌륭한 여행을 즐기는 것뿐이다."
『어바웃 타임 (About Time, 2013)』
오랜만에 제자들을 만났다. 졸업한 지 몇 년 된 녀석들이 학교에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근황을 나눴다. "쌤, 제 친구 기억하세요? 걔 대기업 들어갔어요." "쟤는 의대 갔잖아요." "누구는 벌써 결혼했대요. 신랑이 의사래요."
그렇게 한참 서로의 소식을 전하다가 한 녀석이 말했다. "근데 쌤, 우리 반에서 제일 잘사는 애가 누구냐면..." 그 순간 다른 녀석들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였다. 누가 가장 좋은 직장에 들어갔는지, 누가 가장 비싼 차를 모는지, 누가 가장 그럴싸한 결혼을 했는지. 마치 성적표를 비교하듯 서로를 평가하는 그 시선들.
식사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 묘한 씁쓸함이 밀려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많고 여유가 있는 것을 '잘산다'라고 표현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가치관을 심어주려 애썼던 교사이자 목사로서, 내 안의 '프로질문러' 본능이 꿈틀거렸다.
정말 그럴까? 통장 잔고가 넉넉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스펙을 갖추면 그게 정말 '잘사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사는 부부는 '못사는' 거고, 재벌이지만 매일 싸우고 미워하는 가족은 '잘사는' 걸까?
졸업 후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제자들의 입에서 나온 '잘산다'는 기준이, 내가 그토록 가르치려 했던 가치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모순적인 언어의 유희 속에서 우리는, 아니 내 제자들은 길을 잃은 건 아닐까.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팀은 성인이 된 날,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엄청난 비밀을 듣는다. 바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다. 어두운 곳에 들어가 주먹을 꽉 쥐고 과거의 특정 시점을 떠올리면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얼마나 사기캐인가. 팀은 이 능력을 이용해 완벽한 인생을 만들려 고군분투한다.
첫눈에 반한 여인 메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설펐던 고백의 순간을 수없이 다시 찍고, 친구의 실패한 연극을 구하기 위해 과거를 바꾼다. 그의 인생은 편집 가능한 영화 필름 같았다. 실수가 있으면 잘라내고, 후회가 남으면 다시 찍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우리의 예상을 빗나간다. 팀의 아버지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팀에게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알려준다. 그것은 시간을 되돌려 엄청난 부자가 되거나 역사를 바꾸는 게 아니었다. "하루를 두 번 살아보라." 첫 번째는 평범하게, 남들처럼 치열하고 정신없이 살아가고, 두 번째는 똑같은 하루를 다시 살되 이번에는 긴장을 풀고, 처음엔 놓쳤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살아보라는 것이었다.
팀은 아버지의 조언대로 하루를 두 번 산다. 첫 번째 살 때는 짜증 냈던 편의점 점원의 실수에 두 번째 살 때는 미소로 답하고, 재판에 져서 우울했던 동료에게 농담을 건넨다. 상황은 변한 게 없는데, 그 하루를 대하는 팀의 태도가 변하자 그 하루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침내 팀은 깨닫는다. 진짜 잘산다는 건 시간을 되돌려 실수를 만회하는 게 아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시간 여행을 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이 날을 위해 시간 여행을 온 것처럼, 나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완전하고 즐겁게 매일 지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풀어 말하면, '잘산다는 것'은 완벽한 조건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게 주어진 평범한 하루를 기쁘게 누리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만나' 이야기를 보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배고파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라는 신비한 음식을 내려주셨다. 그런데 여기에는 독특한 규칙이 있었다. "딱 하루치만 거두라."는 것이다. 욕심 많은 누군가는 "내일 비가 오면 어떡해? 모레 아프면 어떡해?" 하며 이틀 치, 삼일 치를 쟁여두었다. 소유가치로 안정을 찾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남겨둔 만나는 다 썩어 구더기가 생겼다.
하나님은 왜 이런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드셨을까? 코스트코처럼 대량으로 쟁여두고 편하게 살게 해주시면 안 되는 걸까?
이유는 명확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고'를 믿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 '공급자'를 믿고 사는 인생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이다.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 오늘 내게 주어진 은혜는 오늘 족하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면 된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오늘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상처를 곱씹느라 오늘을 놓치고, 미래의 불안을 대비하느라 오늘 누려야 할 행복을 유예한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효도할게.", "성공하면 여행 가자." 우리는 늘 행복을 '나중'으로 미룬다. 마치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처럼 행복을 창고에 쌓아두기만 한다.
솔로몬을 보자.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잘살았던' 인물이다. 금은보화, 권력, 지혜, 수많은 아내까지 모든 것을 가졌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그는 '슈퍼 울트라 월클'이다. 그런데 그가 인생 말년에 쓴 전도서에서 뭐라고 고백하는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다 가져봤는데, 하나님 없는 풍요는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진짜 잘사는 비결을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이것도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도서 2:24)." 개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오늘 사랑하는 사람과 밥 한 끼 먹으며 웃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킹 솔로몬보다 더 잘사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영어 단어 'Present'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현재' 그리고 '선물'. 누군가 의도한 것 같지 않은가?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세상은 자꾸 우리를 제품으로 만들려 한다. 더 높은 사양, 더 비싼 가격표를 붙여야 잘산다고 가스라이팅 한다. 그래서 우리는 쉴 새 없이 스펙을 쌓고, 남들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더 벌어야 해, 더 올라가야 해."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작품으로 지으셨다.
작품은 가격표가 없다. 존재 그 자체로 빛난다. 작품으로서 잘산다는 건, 내가 미술관의 가장 좋은 자리에 전시되는 게 아니다. 나를 지으신 작가의 의도대로, 오늘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오늘 내게 주어진 햇살에 감사하며, 뚜벅뚜벅 내 길을 가는 것이다.
『어바웃 타임』의 팀이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마지막으로 산책을 했던 그 순간처럼, 우리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화려한 성공의 순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거니는 소박한 일상일지도 모른다.
잘산다는 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다. 후회 없는 과거를 만들려 애쓰거나, 불안한 미래 때문에 오늘을 희생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 여행을 할 수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초능력, 바로 '지금, 여기'를 온전히 누리는 것이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옷깃을 여미며, 그 안에서 함께 걷는 이의 온기를 느끼는 것. 오늘 하루가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자, 다시 오지 않을 선물임을 기억하는 것.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 거대한 우주라는 여행을 함께하는 시간 여행자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