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인생질문, '왜 비교할까?'
"Why would God give me the desire... but not the talent?"
"신이여, 왜 제게 갈망은 주셨으면서 재능은 주지 않으셨습니까?"
『아마데우스 (Amadeus, 1984)』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휴대폰을 켠다. 유튜브 스튜디오 앱을 열고 어제 올린 영상의 조회수를 확인한다. 300회.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려는데, SNS 알고리즘이 친절하게 추천해준다. 나와 같은 시기에 채널을 시작한 다른 채널의 영상. 조회수 5만. 구독자는 어느새 10만을 넘었다. "뭐야, 이런 채널에 구독자가 왜 이리 많아?"
얼마전 신학교 동기를 만났다. 그는 강남의 나름 중대형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그분의 SNS에 올라오는 수백 명이 참석한 청년부 예배 사진, 화려한 부활절 행사 영상. 전혀 그런 마음이 없지만 날마다 아이들과 딩굴며 마음이 상하는 나 자신을 생각해보면 갑자기 마음이 쪼그라들기도 한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 청년들보다 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눈에 보이는 어떠함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늘 이런 아이러니와 마주하며 살아간다. 목사로서,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너를 특별하게 만드셨어"라고 말하지만, 정작 나는 매일 아침 타인의 성공과 나의 현재를 저울질한다. 참 고약한 마음이다. 이 고약한 심보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영화 『아마데우스』의 주인공 안토니오 살리에르는 당대 최고의 궁정 음악가였다.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대중의 인기를 누렸으며,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음악을 바치고 싶어 했던 경건한 인물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는 성공한 인생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인생 승리자' 아닌가.
그런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나타나면서 그의 인생은 지옥으로 변한다. 모차르트는 경박하고, 음탕하며,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방지축이었다. 하지만 신은 그 건방진 녀석에게 천상의 멜로디를 듣는 귀를, 완벽한 화음을 만들어내는 손을 주셨다.
살리에르는 절규한다. 자신이 평생을 갈망했던 그 재능을, 신을 경외하지도 않는 저 망나니에게 주신 것에 대해 분노한다. 그는 모차르트의 악보를 보며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그 재능을 가진 모차르트를 죽이고 싶도록 질투한다. 영화에서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악보를 손에 들고 떨며 말하는 장면은 섬뜩하다. "이건... 수정의 흔적조차 없어. 처음부터 완벽해."
살리에르의 불행은 그가 음악을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음악가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자신의 음악'이 아닌 '모차르트의 음악'에 꽂히는 순간, 그는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성취를 한순간에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그는 스스로를 '평범한 자들의 수호성인'이라 칭하며 파멸해간다.
비교는 멀쩡한 궁정 음악가를 한순간에 열등감 덩어리로, 실패작으로 만들어버렸다. 풀어 말하면, 비교는 내가 가진 감사를 삭제하고, 그 빈자리에 결핍을 채워 넣는 가장 강력한 독이다.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보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먹는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묻는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라고 대답할 때마다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베드로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묻는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요한복음 21:21)
풀어 말하면, "주님, 저는 이렇게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데, 저 친구는 뭐 하라고 하실 건가요? 저보다 더 좋은 사명을 주시는 건 아니겠죠?"라는 질문이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명을 받았다. 그런데 그 귀한 순간에, 옆 사람이 신경 쓰인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22)
이 말씀은 "옆 사람 신경 끄고,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나는 너를 요한과 다른, 너만의 서사로 이끌어갈 것이다."라는 사랑의 선언이다.
베드로는 결국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고,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둘의 길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둘 다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었다. 비교할 필요가 없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비교에 취약할까? 세상이 우리를 제품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마트 진열대를 생각해 보자. 우유, 과자, 라면은 가격과 용량, 성분으로 비교당한다. 가성비가 떨어지는 제품은 가차 없이 도태된다.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은 '대체 가능'하기 때문에, 남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펙을 쌓고, 연봉을 비교하고, 구독자 수로 서열을 매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작품으로 지으셨다. 미술관에서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두고 "누가 더 낫냐?"고 묻는 것은 무식한 질문이다. 작품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서로 다른 화풍,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다.
살리에르의 음악은 살리에르의 것이었고, 모차르트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것이었다. 하나님은 살리에르에게 모차르트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살리에르만의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길 원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를 모차르트라는 '제품'과 비교하는 순간, 그는 신이 주신 자신의 고유성을 스스로 부정해버렸다.
풀어 말하면, 우리가 비교하는 이유는 "나는 대체 불가능한 작품이다"라는 창조의 섭리를 잊었기 때문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이유는, 내 손에 쥐어진 떡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회수가 안 나와서 우울할 때, 친구의 성공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지금 너는 진열대에 놓인 상품이니? 아니면 작가의 손끝에서 나온 작품이니?"
비교는 시선을 '옆'으로 돌릴 때 시작된다. 베드로처럼 뒤를 돌아보며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을 때 시작된다. 옆을 보면 누군가는 나보다 앞서가고, 누군가는 나보다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 시선 끝에는 열등감 아니면 교만 뿐이다.
비교를 멈추는 방법은 시선을 '위'로 돌리는 것이다. 나를 만드신 작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작가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진열대 옆의 다른 상품이 나보다 비싸게 팔린다고 슬퍼할 이유가 무엇인가?
살리에르가 만약 모차르트의 재능을 질투하는 대신, 자신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빚어낸 음악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렸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는 '비운의 2인자'가 아니라, 모차르트와는 또 다른 깊이를 가진 거장으로, 그리고 행복한 음악가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비교는 내가 가진 고유한 빛을 스스로 끄는 행위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으셨다.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빚으신, 세상에 단 하나뿐인 '한정판'이다.
남들의 하이라이트 장면과 나의 비하인드 영상을 비교하며 괴로워하지 말자. 옆 사람의 길과 내 길을 비교하며 조급해하지 말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그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하신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당신은 누군가와 비교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님의 걸작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