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인생질문, '결혼이 필요할까?'
"Thanks for the adventure - now go have a new one!"
"모험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이제 당신의 새로운 모험을 떠나요!"
『업 (Up, 2009)』
요즘 학교나 교회 청년부에서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분위기가 싸해진다. "목사님, 선생님,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무슨 결혼이에요?", "결혼하면 자유도 없고 돈만 들잖아요. 혼자가 편해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틀린 말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관점, 즉 효율성의 측면에서 보면 결혼은 '미친 짓'에 가깝다. 내 시간, 내 돈, 내 감정을 타인과 나눠야 하고, 심지어 육아까지 더해지면 내 삶은 마이너스 통장처럼 쪼그라드는 것 같으니까.
나 또한 유부남이자 아빠로서 가끔은 혼자만의 완벽한 고요를 꿈꾼다. 주말 아침, 아이의 고함 소리 대신 우아하게 커피 한 잔 마시며 책을 읽는 삶. 아내의 잔소리 없이 내 맘대로 양말을 벗어던질 수 있는 자유.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글을 쓰기 위한 표현일 뿐 사실 큰 동의는 되지 않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우리는 결혼을 일종의 '합병'으로 생각한다. 두 회사가 합쳐져서 더 큰 이익을 내야 하는데, 막상 합쳐보니 구조조정 당하고 적자만 나는 것 같으니 "굳이 이걸 왜 해?"라는 질문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결혼은 정말 손해 보는 장사일까? 효율성이 떨어지는 이 제도가 인류 역사 내내 지속된 이유는 단지 종족 번식 때문일까?
픽사 애니메이션 『업』의 오프닝 5분은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슬픈 시퀀스로 꼽힌다. 주인공 칼과 엘리는 어릴 적 만나 '파라다이스 폭포'에 가는 꿈을 꾸며 결혼한다.
그들은 낡은 집을 고쳐 살며 동전을 모은다. '파라다이스 폭포 기금'이라고 쓰인 저금통에 조금씩 돈을 모으지만, 삶은 그들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타이어가 펑크 나고, 병원비가 나가고, 지붕이 무너진다. 그때마다 저금통을 깨고, 다시 채우고, 또 깨는 반복. 엘리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아픔을 겪고, 칼은 묵묵히 그녀 곁을 지킨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거창한 모험이 아니었다. 함께 페인트칠을 하고, 구름 모양을 보며 웃고, 언덕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지극히 평범하고 어쩌면 찌질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엘리는 병원 침대에서 칼의 손을 잡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결국 엘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다. 칼은 혼자 남겨진다. 그는 엘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즉 자신의 결혼 생활은 '미완성'이자 '실패'였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팍한 노인이 된다. 동네 꼬마들한테 소리를 지르고, 우체부에게 문전박대를 하고, 세상 모든 것에 문을 걸어 잠근다.
그는 집을 풍선으로 띄워 파라다이스 폭포로 가는 무모한 여행을 시작한다. 어떻게든 그 약속, 그 목표를 달성해야만 자신의 사랑이 증명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저기에만 가면, 저 폭포에만 깃발을 꽂으면, 엘리에게 제대로 된 남편이었다고 증명할 수 있어."
그러나 영화 후반부, 칼은 엘리가 남긴 '모험 책'의 뒷장을 우연히 보게 된다.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던, 엘리가 채우지 못한 페이지들. 하지만 그곳에는 두 사람이 함께 늙어가며 찍은 소소한 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페인트칠하는 모습, 소풍 가는 모습, 손을 잡고 구름을 보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 장에 적힌 엘리의 메시지.
"Thanks for the adventure - now go have a new one!" (모험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이제 당신의 새로운 모험을 떠나요!)
이 순간 칼은, 그리고 우리는 깨닫는다. 그들이 꿈꾸던 파라다이스 폭포에 깃발을 꽂는 것이 모험이 아니었다. 타이어를 갈고, 병간호를 하고, 손을 잡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그 지루하고 평범한 시간들이 바로 엘리에게는 최고의 '모험'이었다는 것을.
결혼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비를 맞고, 언덕을 오르는 그 과정 자체가 모험이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다. 하지만 둘이 가면 멀리, 그리고 깊이 갈 수 있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신 후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세기 2:18)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다. 이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한다. 마치 하나님이 아담에게 '보조 인력'을 배치해주신 것처럼, 여자를 남자를 돕는 조연 정도로 생각한다. 특히 가부장적 문화에서 이 구절은 여성을 남성의 보조자로 격하시키는 도구로 악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먼저 '돕는 배필'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제르(Ezer)'는 '구원자' 혹은 '전쟁터에서 나를 돕는 강력한 원군'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실 때 사용되는 바로 그 단어다. 시편 121편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에서 '도움'이 바로 이 '에제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조의 방식이다. 하나님은 여자를 흙으로 새로 빚지 않으셨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취하셨다. 왜일까? 이것은 단순한 창조 방법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원래 하나였다는 신학적 선언이다.
아담이 여자를 보고 처음으로 한 말을 보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세기 2:23)
이것은 "오, 예쁘네"가 아니다. "드디어 나와 같은 존재를 만났다"는 존재론적 고백이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독립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원래 하나였던 존재가 둘로 나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세기 2:24)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결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원래 하나였던 존재가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회복'이다. 결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창조 목적의 완성이다.
혼자 사는 삶은 편하다. 내 맘대로 해도 태클 걸 사람이 없다. 새벽 3시에 라면을 끓여 먹어도, 거실에 옷을 널어놔도, 주말 내내 게임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편한 것이지, '온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하신 이유는, 인간이 혼자서는 창조 목적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창조되었고, 관계 속에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다.
내가 쓰러졌을 때, 내 찌질한 바닥을 보였을 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 줄 사람. 밤새 끙끙 앓을 때 이마에 손을 대어줄 사람. 성공했을 때 함께 기뻐해주고, 실패했을 때 "괜찮아, 우리 다시 시작하면 돼"라고 손을 잡아줄 사람. 그 사람은 단순히 '좋은 동반자'가 아니라, 나의 '반쪽', 원래 하나였던 나의 존재다.
우리는 모두 모난 돌이다. 상처받고 뾰족해진 자아를 가지고 있다. 이 모난 돌들이 강가에서 서로 부딪치고 깨지면서 둥글둥글한 조약돌이 된다. 결혼이 바로 그 과정이다.
서로의 날카로운 부분에 찔려 피가 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 부대낌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인간, 즉 작품으로 빚어진다. 결혼하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나만 아는 이기적인 어린아이로, 절반의 존재로 늙어갈지도 모른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유일한 존재, 배우자와 자식을 사랑하기 위해 내 자아를 꺾는 훈련. 그것이 결혼이 주는 유익이자 고통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창조주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를 가장 온전히 실현하는 방법이다.
결혼은 두 개의 독립된 존재가 만나는 합병이 아니다. 원래 하나였던 존재가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회복이다.
세상은 우리를 제품으로 보기에 결혼을 '비용'으로 계산한다. "결혼하면 내 가치가 떨어지잖아. 내 시간이 없어지잖아. 내 돈이 사라지잖아."
맞다. 제품의 논리로 보면 결혼은 손해다. 스펙 쌓을 시간에 기저귀를 갈아야 하고, 내 취미 생활을 즐길 돈으로 배우자의 병원비를 내야 하고, 나 혼자 결정하면 될 일을 상의하고 타협해야 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작품이다. 작품은 효율성을 따지지 않는다. 작품은 '이야기'를 가진다.
『업』의 칼 할아버지가 혼자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는 그저 고집불통 독거노인이었다. 하지만 러셀이라는 꼬마, 더그라는 말하는 개, 그리고 엘리와의 추억과 연결되었을 때 그의 인생은 감동적인 서사가 되었다.
칼은 파라다이스 폭포에 집을 내려놓는다. 그 오랜 집착, 그 오랜 죄책감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러셀을 구하기 위해 다시 떠난다. 엘리가 그에게 준 진짜 선물은 파라다이스 폭포로 가는 꿈이 아니라, "너는 이제 너의 새로운 모험을 떠날 수 있어"라는 허락이었다.
결혼이 필요한 이유는, 내가 혼자서도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나의 결핍을 채워주고, 나 또한 누군가의 결핍을 채워주며, 서로가 서로에게 '엘리의 모험 책'이 되어주는 것.
내가 개뿔 아무것도 없을 때, 세상이 나를 실패한 제품 취급할 때, 유일하게 내 곁에 남아서 "당신은 그 인간들 전부보다 가치 있어"라고 말해줄 한 사람을 만드는 것. 그것이 결혼이다.
결혼은 필수가 아닐 수도 있다. 바울처럼 혼자서도 충만하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면 독신도 귀한 은사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나는 왜 이렇게 외로울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삭막할까?"라고 묻고 있다면, 효율성의 계산기를 내려놓고 '모험'을 떠날 준비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결혼은 파라다이스 폭포에 깃발을 꽂는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펑크 난 타이어를 함께 갈고, 서로의 흰머리를 뽑아주며, "이 지루한 모험을 너와 함께해서 참 다행이야"라고 말하는, 가장 따뜻하고 인간적인 여정이다.
그러니 쫄지 말자. 당신의 인생이라는 집에 풍선을 달아줄 누군가가, 혹은 당신이 풍선을 달아줘야 할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