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인생질문, '공부는 왜 할까?'
"We're going to science the shit out of this."
"우리는 과학으로 이 X같은 상황을 돌파할 거야."
『마션 (The Martian, 2015)』
화성에 홀로 남겨진 식물학자 마크 와트니는 죽음 앞에 선다. 산소도 부족하고, 물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먹을 것이 없다. 그가 가진 것은 학부 때 배운 식물학 지식과 몇 개의 감자, 그리고 동료들의 배설물뿐이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를 펼쳤다. 화학식을 쓰고, 토양의 성분을 분석하고, 물을 만드는 방법을 계산했다. 그리고 화성 표면에 인류 최초의 감자밭을 일궜다. 그가 대학 강의실에서 졸지 않고 배웠던 광합성의 원리, 질소 순환, 수소 연소 반응. 그 모든 '쓸데없어 보이던' 지식이 그의 생명을 구했다.
영화 속 와트니의 독백은 인상적이다. "우리는 과학으로 이 X같은 상황을 돌파할 거야." 그에게 과학은, 공부는 단순히 학점을 따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언어였고, 희망의 문법이었으며, 무엇보다 창조주가 이 우주에 새겨놓으신 법칙을 읽어내는 행위였다.
중세 수도원에서 수사들이 가장 열심히 한 일 중 하나는 사본 필사가 아니라 천문 관측이었다. 그들은 밤하늘의 별을 기록하고, 행성의 궤도를 계산했다. 왜?
그들은 우주가 무작위의 혼돈이 아니라, 정교한 질서로 짜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질서 안에 창조주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고 믿었다. 케플러는 행성 운동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공부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는 행위다. 수학 공식을 외울 때, 우리는 단순히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한 도구를 습득하는 게 아니다. 우주를 질서 있게 지으신 분의 논리를 배우는 것이다. 역사를 배울 때, 우리는 연도를 암기하는 게 아니라 인류를 이끌어오신 섭리의 궤적을 읽는 것이다. 생물학을 배울 때, 우리는 세포의 구조를 그리는 게 아니라 생명을 설계하신 분의 정교함에 경탄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19:1)
하늘만 하나님을 선포하는가? 아니다. 원자의 구조도, 미적분의 원리도, 언어의 체계도, 역사의 흐름도 모두 창조주를 선포한다. 공부는 그 선포를 듣는 귀를 여는 일이다.
애들은 대부분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학 선생님들께 죄송하지만, 이건 팩트다. 한 학생이 물었다. "목사님, 저는 수학을 왜 배워야 해요? 나중에 쓸 일도 없을 텐데요."
나는 반문했다. "너 밤하늘 본 적 있지? 별들이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정교한 타원 궤도로 움직이고 있어. 그 궤도를 계산하는 게 미적분이야. 네가 지금 배우는 그 식이, 수억 광년 떨어진 은하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게..." 학생은 내 말을 끊었다. "그래서요? 그게 제 인생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학교 현장에서 늘 마주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아이들에게 공부는 이미 노동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마치 삶에 지친 노동자가 회사에서 사정없이 몰아치는 업무를 향해 질문하듯, 아이들도 묻는다. '이거 시험에 나와요?' '이거 했던 거 아니에요?' '이걸 왜 지금 해야 해요?' 그 질문 뒤에 숨겨진 진짜 의미는 명확하다. "이거 안 하면 안 돼요? 최소한으로만 하면 안 돼요?"
수련회 같은 곳에서는 기뻐 뛰며 춤을 추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그 아이들이, 교실에 돌아오면 눈빛이 죽어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의 원리를 배워가는 과정이어야 할 공부의 현장에서, 아이들은 하기 싫은 일을 최대한 피하려는 노동자처럼 앉아 있다. 배움은 상실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이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가 공부를 그렇게 만들었다. "이거 시험에 나온다"는 말로 아이들을 협박했고, "이거 못하면 대학 못 간다"는 말로 공포를 심었으며, "1등급 맞아야 인생 편하다"는 말로 경쟁을 부추겼다. 공부는 어느새 생존의 도구가 되었고, 지식은 점수를 얻기 위한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원래 공부는 그런 게 아니었다.
공부가 '창조주를 알아가는 예배'가 될 때, 모든 것이 달라진다. 화학 시간에 원소 주기율표를 외울 때, 단순히 "H는 수소, He는 헬륨" 이렇게 암기하는 게 아니다. 잠깐 멈춰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재료를, 누가 이렇게 정교하게 배치했을까? 왜 하필 이 순서일까? 왜 이 원소들은 결합하고, 저 원소들은 반발할까?" 그 질문 앞에 서는 순간, 주기율표는 더 이상 외워야 할 암기 목록이 아니다. 창조주가 설계하신 우주의 레시피가 된다.
문학 시간에 셰익스피어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To be or not to be"를 해석 문제로만 접근하면, 그건 그냥 영어 지문이다. 하지만 잠깐 멈춰서 생각해본다. "언어를 창조하고, 인간에게 이야기를 나누는 능력을 주신 분은 누구일까? 왜 인간만이 은유를 이해하고, 상징을 만들고,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질문 앞에 서는 순간, 셰익스피어는 더 이상 점수를 따기 위한 텍스트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언어라는 선물의 정점이 된다.
공부는 더 이상 1등급을 따기 위한 경쟁이 아니다. 창조주가 만드신 세계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가는 보물찾기가 된다. 수학 공식은 우주의 질서를 읽는 암호 해독기가 되고, 역사는 하나님이 인류를 이끌어온 발자취가 되며, 과학 실험은 자연법칙을 직접 확인하는 예배의 행위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이거 시험에 나와요?"라는 질문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고, 경이롭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첫 번째 과제가 무엇인지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19)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작명 놀이가 아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대상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뜻이다. 아담은 코끼리를 보며 그 특징을 관찰하고, 독수리를 보며 그 날개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름을 지었다. 그것이 인류 최초의 '공부'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냥 먹고 놀아라"고 하지 않으셨다. "내가 만든 이 세계를 탐구하고, 이해하고, 다스려라"고 하셨다. 공부는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적 사명이다. 우리가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익히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단지 대학에 가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장대한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청지기로서 살아가기 위함이다.
영화 『마션』으로 돌아가자. 마크 와트니는 왜 포기하지 않았을까? 그가 가진 과학 지식이 뛰어나서? 그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지식이 '진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은 H₂O로 이루어져 있고, 식물은 광합성을 하며, 화학 반응은 예측 가능하다는 것을 믿었다. 즉, 이 우주가 무작위가 아니라 법칙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신뢰했다.
그 신뢰는 어디서 오는가?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셨고, 그 질서는 신실하다고. 해는 매일 뜨고, 계절은 돌아오며, 씨앗은 싹을 틔운다. 이것이 창조 질서다. 그리고 공부는 그 질서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활용하는 과정이다.
와트니는 화성 흙에 감자를 심으며 사실상 예배를 드린 것이다. "당신이 만드신 이 땅은 생명을 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정하신 법칙은 화성에서도 작동합니다." 그는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위 자체가 창조주에 대한 신뢰의 고백이었다.
그렇다면 성적은 중요하지 않은가? 아니다. 성적은 중요하다. 하지만 성적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다. 와트니가 화성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가 A+를 받으려고 공부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식물의 원리가 궁금해서, 화학 반응이 신기해서, 우주의 법칙을 알고 싶어서 공부했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지식이 결과적으로 그를 살렸다.
공부의 목적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될 때, 성적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왜냐하면 진리를 향한 열정은 거짓 지식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암기가 아니라 깊은 이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적만을 목적으로 공부하면 어떻게 될까? 시험이 끝나면 배운 것을 다 잊어버린다. 1등급을 받아도 공허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주와 연결되지 않은, 공중에 뜬 숫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아이들은 여전히 시험을 봐야 하고, 성적표를 받아야 하며, 입시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 서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를 찾아온 그 학생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네가 지금 배우는 수학이, 당장 네 인생에 쓸모없어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식 하나하나는 하나님이 이 우주를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야. 네가 그걸 풀 때마다, 너는 사실 창조주의 마음을 따라 생각하는 거야. 그게 얼마나 특권인지 아니?"
그러면 아이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목사님, 그래도 수학은 싫어요." 괜찮다. 그래도 씨앗은 심어졌다. 언젠가, 그 아이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의 궤도를 생각할 때, 혹은 세상의 질서 앞에서 경탄할 때, 그때 그 씨앗이 싹을 틔울 것이다.
공부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가장 고귀한 예배의 행위다.
수학 공식 하나를 배울 때, 우리는 우주의 질서를 설계하신 분의 지혜를 만난다. 역사책 한 페이지를 읽을 때, 우리는 인류를 이끌어오신 섭리의 손길을 본다. 과학 실험 하나를 할 때, 우리는 자연법칙을 정하신 분의 신실함을 경험한다.
그러니 오늘, 책상 앞에 앉을 때 이렇게 기도해보자.
"하나님, 제가 오늘 배울 이 지식을 통해 당신을 더 깊이 알게 하소서. 이 공부가 단지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이해하고 경탄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그때, 공부는 더 이상 고역이 아니다. 창조주를 만나는 거룩한 순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