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번째 인생질문,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걸까?'
"You have no idea how many legends have walked in these halls. And what's worse, you don't care. Because this place, where so many people would die to work, you only deign to work."
"이 복도를 거쳐 간 전설적인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넌 짐작도 못 할 거야. 더 한심한 건, 네가 관심도 없다는 거지. 수많은 사람이 목숨 걸고 일하고 싶어 하는 이곳에서, 너는 그저 마지못해 일하고 있을 뿐이니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 2006)』
월요병이라는 말이 있다. 일요일 저녁, 주말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직감하는 순간 직장인들의 가슴은 답답해진다. 학교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교무실에 들어서는 선생님들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주말만 보고 산다"는 말이 인사처럼 오간다.
아이들에게 "너 나중에 뭐 하고 살래?"라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돈 많이 버는 거요", "건물주요"라고 대답한다. 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빨리 돈 벌어서 일 안 하고 사는 게 꿈이다.
우리는 왜 일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의 일차적인 목적은 '생존'이다. 카드값을 내야 하고, 대출 이자를 갚아야 하고, 아이들 학원비를 벌어야 한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든다. 우리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노동의 시간이 단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역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너무 비참한 존재가 아닐까?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이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 곧 먹고사는 문제다. 많은 사람이 이 단계에서 허우적거리며 일을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이 다닙니다."라는 자조 섞인 농담 속에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있다.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통장에 평생 먹고살 돈이 꽂힌다면, 우리는 일을 그만둘까? 만약 그렇다면 일은 '필요악'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고 하나님은 일에 대해 조금 다르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앤디 삭스는 저널리스트가 꿈이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패션 매거진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의 비서로 취직한다. 그녀에게 이 직장은 그저 '월급을 주는 곳'이자, 경력을 쌓아 다른 곳으로 튀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다.
그녀는 패션을 무시하고, 자신의 일을 하찮게 여기며, 친구들에게 "난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니야"라고 끊임없이 변명한다. 첫 출근날, 그녀는 패션 잡지사에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나타난다. 그녀의 옷차림은 "나는 이런 곳 관심 없어요"라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수석 아트 디렉터 나이젤은 뼈 때리는 말을 던진다.
"너는 노력하고 있지 않아. 너는 징징대고 있는 거야... 수많은 사람이 목숨 걸고 일하고 싶어 하는 이곳에서, 너는 그저 마지못해 일하고 있을 뿐이야."
앤디에게 일은 '밥벌이' 수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시간과 노동력을 파는 거래 정도로 여겼다. 시키는 대로 하고, 돈을 받고, 퇴근 후의 삶만을 기다리는 삶. 이것은 전형적인 소외된 노동이다.
칼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결과물로부터 소외될 때, 일은 기쁨이 아니라 형벌이 된다.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오늘도 버텨야지"라고 생각하며, 퇴근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는 삶. 그것은 생존일 수는 있어도 삶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중반부, 앤디가 자신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전문성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눈빛은 달라진다. 미란다가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미리 챙기는 센스, 불가능해 보이는 해리포터 원고를 구하는 능력. 그녀는 더 이상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알바생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프로'가 되어가고 있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해서 그 벌로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천국 가면 일 안 하고 맨날 놀고먹겠지?"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라.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기 전, 에덴동산에서 이미 아담에게 일을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범죄 이전의 노동은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함께 다스리고 가꾸는,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거룩한 행위였다. 즉, 일의 본질은 '생존 수단'이 아니라 '소명의 실현'이었다. 범죄 이후 달라진 것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노동의 '성격'이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땀을 흘려야만 먹을 것을 얻게 되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세기 3:18-19)
일이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의 본질이 '저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겪는 상사와의 갈등, 업무의 스트레스, 성과의 압박은 '가시덤불'이다. 하지만 그 가시덤불을 헤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자로서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세상은 우리를 부품으로 취급한다. "너는 이 회사에서 얼마만큼의 이윤을 남길 수 있어?" 그래서 우리는 대체되지 않기 위해, 폐기 처분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이런 관점에서 일은 전쟁터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작품으로 부르셨고, 우리의 일터 또한 작품을 빚는 공방으로 허락하셨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단순히 월급을 받기 위한 수단이라면 나는 지식 소매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아이들의 영혼을 깨우고, 그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일이라고 믿는다면 나는 '교육 예술가'가 된다.
청소부가 거리를 쓸 때, "에이, 더러워 죽겠네" 하며 쓸면 그는 환경미화원이라는 직업인에 머문다. 하지만 "내가 빗자루질을 한 번 할 때마다 지구의 한 모퉁이가 깨끗해진다"라고 믿는다면, 그는 베토벤이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과 같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결말에서 앤디는 화려한 패션계를 떠나 원래 꿈꾸던 신문사 면접을 본다. 그녀는 미란다를 떠났지만, 미란다 밑에서 치열하게 일했던 시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시간은 그녀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일의 태도를 바꿨기 때문이다.
그녀가 미란다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휴대폰을 분수대에 던져버리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일이 내 삶을 집어삼키게 두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일터에서 배운 것들을 내 삶의 자산으로 삼겠다는 주체적인 선언이었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상사의 갑질에 치이고, 박봉에 시달리다 보면 소명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있다. 나 또한 그렇다. 하지만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는 지금 생존을 위해 일하는가, 아니면 사명을 위해 일하는가?"
매슬로우의 최상위 욕구는 '자아실현'이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그 위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자기 초월'이다. 나를 넘어 타인을 향하는 것. 내가 만든 보고서가, 내가 파는 커피 한 잔이, 내가 가르치는 수업이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고, 누군가에게 기쁨을 준다면, 그것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성직'이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말했듯, 성직자만 거룩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기저귀를 가는 엄마도, 밭을 가는 농부도 믿음으로 행하면 그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것,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평생 배고픈 짐승처럼 살아야 한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존재를 넘어, 누군가를 먹여 살리기 위해, 그리고 세상을 조금 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일하는 존재다.
일은 형벌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창조의 초대장이다. 비록 가시덤불이 우리를 찌를지라도, 그 안에서 우리는 나를 깎아 다듬어 작품이 되어가고, 내 손끝의 수고로 누군가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
그러니 오늘 출근길,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가지 말고, 내게 맡겨진 세상의 한 모퉁이를 가꾸러 가는 정원사처럼 당당하게 걸어가자. 당신의 땀방울은 월급보다 훨씬 고귀한 가치를 지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