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인생질문, '실패는 끝인가?'
"It ain't about how hard you hit. It's about how hard you can get hit and keep moving forward."
"얼마나 세게 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얼마나 센 타격을 맞고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록키 발보아 (Rocky Balboa, 2006)』
아이들이 마주하는 처음이자 가장 강렬한 실패는 아마도 대입이 아닌가 싶다. 합격을 하면 강아지처럼 복도를 뛰어다니며 좋아하기도 하고 떨어지기라도 하면 표정관리를 하다 이내 무너지는 처절한 실패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교사로 가장 난처한 일은 똑같은 대학에 지원서를 냈는데 한 놈은 떨어지고 한 놈은 붙었을 때 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아래 모든 일들이 이뤄지는 것이고 각자 인생을 향한 계획이 있으며 대학이 중요하긴 하지만 스스로 실패자,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는 고3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지금 그 아이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젠 다 끝났다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아이, 고작 열아홉, 인생의 서론도 채 쓰지 않은 아이가 자신의 삶 전체에 '실패'라는 딱지를 붙이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
이런 좌절감은 비단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 역시 유튜버로서 야심 차게 밤을 새워 기획하고 편집한 영상이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지 못해 조회수가 바닥을 칠 때면 의외로(?) 자괴감에 시달린다. "뭐가 잘못된걸까?" 다른 채널을 탐색하다보면 분노한다. "뭐야, 나랑 다른게 없는 것 같은데?! 여긴 왜 이래?!
생각해보면 우리는 크고 작은 실패 앞에서 너무도 쉽게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생각해볼 문제이다. 왜 우리는 실패를 끝이라고 단정짓는 것일까?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면, 취업 면접에서 떨어지면, 사업이 망하면 우리의 인생은 거기서 막을 내려야 하는 걸까? 진부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가 날마다 겪는 현실의 문제가 아닌가?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개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개념을 발표했다. 피할 수 없는 전기 충격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개는, 나중에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져도 탈출하려 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교육과 구조가 아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이 '학습된 무기력'을 주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 한 번의 시험, 단 한 번의 실수로 등급이 매겨지고 낙오자로 낙인찍히는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실패를 '수정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결론'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받아왔다.
영화 『록키 발보아』에서 전설적인 복서 록키는 나이가 들어 초라해진 자신을 향해 세상이 던지는 비아냥 속에서도 다시 링에 오를 준비를 한다. 아들 로버트는 아버지의 그런 무모한 도전 때문에 자신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다며 록키를 원망한다. 자신의 실패와 찌질함을 거대한 아버지의 그림자 탓으로 돌리는 아들에게, 록키는 인생의 본질을 찌르는 명대사를 던진다.
"세상은 따스한 햇살과 무지개로만 채워져 있지 않아. 아주 험악하고 비열한 곳이지. 하지만 얼마나 세게 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얼마나 센 타격을 맞고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이기는 건 그렇게 하는 거야!"
록키의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준다. 실패는 타격을 받고 쓰러지는 순간이 아니다. 쓰러진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나는 끝났어"라고 변명하며 다시 일어서기를 포기할 때, 비로소 진짜 실패가 완성된다. 풀어 말하면, 맞고 넘어지는 것은 살아있는 자가 겪는 당연한 물리적 현상일 뿐, 내 존재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마가 요한'의 이야기를 보자. 그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첫 번째 선교 여행에 동행했던 젊은 청년이었다. 그런데 선교 여행이 생각보다 너무 험난하고 힘들자, 마가 요한은 중간에 짐을 싸서 집으로 도망쳐 버린다. 그는 명백한 실패자였고, 포기자였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은 마가 요한에게 깊은 실망과 분노를 느꼈다.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가 다시 그를 데려가자고 제안했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우리를 버리고 도망친 실패자를 또 데려갈 수 없다!"
이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는 심하게 다투고 결국 갈라서게 된다. 마가 요한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버린 바울의 차가운 정죄 앞에서 지독한 '학습된 무기력'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 나는 끈기도 없고 비겁한 놈이야.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리더도 나를 포기했잖아.'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실패자 마가 요한을 바나바가 끝까지 품어주고 믿어준 것이다. 바나바는 그의 실패를 질책하는 대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훗날,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 이렇게 당부한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후서 4:11)
그뿐인가? 이 도망자 마가 요한은 예수님의 행적을 가장 생생하게 기록한 『마가복음』의 저자가 된다.
마가 요한의 실패는 그의 인생을 망가뜨리지 못했다. 그의 첫 선교 여행 도주 사건은 분명 아픈 타격이었지만, 그는 록키의 말처럼 그 타격을 맞고도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바울이라는 날카로운 잣대로 그를 폐기 처분하지 않으시고, 바나바라는 은혜의 잣대로 그를 다시 링 위에 세워주셨다.
우리는 실패를 직면할 때마다 내 인생의 문장에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내 대학 입시는 끝났다." "내 사업은 망했다." "내 인간관계는 파탄 났다." 마침표를 찍으면 문장은 거기서 종결된다. 더 이상 이어질 이야기가 없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마침표로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찍은 그 마침표 아래에 살짝 꼬리를 달아 '쉼표'로 바꾸신다. "그래, 네가 시험에 떨어졌지(,), 하지만 그 경험이 너를 더 단단하게 만들 거야." "그래, 네가 큰 실수를 했지(,), 하지만 내가 널 빚어가고 있으니 여전히 넌 공사 중이야."
기독교 교육학적 관점에서 볼 때, 실패는 학생을 정죄하기 위한 붉은 펜이 아니다. 학생이 어느 부분에서 넘어지는지 파악하고 다시 가르치기 위한 교사의 진단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교사는 우리의 실패라는 오답 노트를 보며 화를 내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정답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곁에 앉아 연필을 쥐어주신다.
실패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많은 쉼표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한 번 넘어졌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굴지 말자. 유튜브 조회수가 망했어도 내일 다시 카메라를 켜면 되고, 아이에게 화를 냈어도 내일 다시 미안하다고 안아주면 그만이다.
실패는 문장의 끝을 알리는 마침표가 아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는 쉼표다. 세상이 당신에게 던진 강한 타격에 쓰러져 있다면, 가쁜 숨을 내쉬며 다시 무릎을 짚고 일어나라. 당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글쓰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링 위에서 얻어맞고 코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당신에게, 수건을 던지는 대신 조용히 귓가에 속삭여주고 싶다.
"Keep moving forward.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