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번째 인생질문, '게으름은 나쁜 것인가?'
There is no secret ingredient. It's just you.
특별한 비법은 없어. 그냥 너 자신일 뿐이야.
『쿵푸팬더 (Kung Fu Panda, 2008)』
주말 아침,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어 꼼짝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며 아내가 한숨을 쉰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책상에 엎드려 미동조차 없는 아이들을 보면, 교사이자 아빠로서 내 안의 '잔소리 본능'이 꿈틀거린다. "야, 일어나! 청춘이 아깝지 않냐? 뭐라도 좀 해!"
우리는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소위 '갓생'을 살아야만 가치 있는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독서를 하는 사람들의 브이로그를 띄워주며,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무언의 눈빛으로 정죄한다.
자본주의와 효율성의 세계관 속에서 '게으름'은 곧 실패요, 나태라는 도덕적 죄악으로 치부된다. 시간을 금처럼 쓰지 않으면 인생의 낙오자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우리를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남들보다 행동이 굼뜨고 느린 것은 정말 비난받아 마땅한 '나쁜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타인의, 그리고 나의 게으름 이면에 숨겨진 진짜 메시지를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영화 『쿵푸팬더』의 주인공 '포'는 국수 가게에서 일하는 뚱뚱하고 둔한 팬더다. 그는 무적의 5인방처럼 날렵하지도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수련을 하지도 않는다. 계단 몇 개만 올라도 숨을 헐떡이며 뻗어버리는,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캐릭터다. 어쩌다 보니 우주적 우연으로 '용의 전사'로 발탁되지만, 스승인 시푸 사부의 눈에 포는 그저 구제 불능의 게으름뱅이일 뿐이었다. 시푸 사부는 자신의 엄격하고 강도 높은 훈련 방식에 따라오지 못하는 포를 보며 절망한다.
그런데 어느 날, 시푸 사부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다. 배가 고팠던 포가 찬장 높은 곳에 숨겨둔 쿠키를 먹기 위해,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완벽한 다리 찢기와 점프력을 보여준 것이다.
이때 시푸 사부는 깨닫는다. 포가 게으르고 무능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훈련 방식이 포의 고유한 특성과 맞지 않았음을. 시푸는 즉시 훈련 방식을 바꾼다. 엄격한 규율 대신 '만두'를 이용해 포를 훈련시킨다.
먹을 것을 향한 포의 열정과 본능을 활용하자, 포의 둔했던 몸놀림은 그 어떤 쿵푸 마스터보다 빠르고 창의적인 무술로 변모한다.
심리학자 알렉산더 토마스와 스텔라 체스는 뉴욕 종단 연구를 통해 아동의 '기질'을 9가지 차원으로 분류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 고유한 특성이다. 우리가 흔히 '게으르다'라고 낙인찍는 아이들 중 상당수는 사실 활동성이 낮거나, 새로운 환경에 천천히 적응하는 '느린 기질'을 타고난 경우다. 이들은 에너지가 고갈되어 충전할 시간이 필요하거나, 상황을 속으로 조심스럽게 파악하고 있는 중일 뿐이다.
그런데 부모나 교사가 이 아이들에게 에너지가 넘치고 템포가 빠른 아이들의 잣대를 들이대면 어떻게 될까? 토마스와 체스의 이론에 따르면, 이는 환경의 요구와 아이의 기질이 충돌하는 심각한 '부적합'을 초래한다.
풀어 말하면, 사과나무에 "너는 왜 빨리 포도 열매를 맺지 않느냐"며 다그치는 격이다. 아이의 게으름은 도덕적 태만이 아니라, 자신의 기질과 맞지 않는 환경에서 에너지를 방전당해 멈춰 서 버린 상태일지도 모른다. 시푸 사부가 포의 기질에 훈련 방식을 맞추어 최적의 '조화의 적합성'을 만들어냈듯, 우리도 누군가를 게으르다고 판단하기 전에 그의 고유한 기질적 리듬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 상담학에서 내담자를 바라보는 매우 중요하고 아름다운 원리가 있다. 한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문제 행동을 단지 도덕적 타락이나 '죄'로만 규정하지 말고, 그 이면에서 신음하고 있는 '고통받는 자'의 위치를 먼저 살피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과제를 내주면 늘 미루고 안 해오는 아이가 있다. 겉보기엔 영락없는 '게으른 녀석'이다. 하지만 상담실에 앉혀놓고 마음을 열어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그 아이는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내가 이 과제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면 부모님께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실패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회피'라는 생존 전략을 택한 것이다.
어떤 아이는 부모의 이혼이나 가정 내 폭력으로 인해 마음의 에너지를 몽땅 소진해 버려서, 일상을 살아갈 남은 동력이 한 방울도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 아이들에게 "너는 왜 이렇게 게으르니! 학생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건 나쁜 거야!"라고 율법적인 잣대로 정죄부터 한다면, 그건 아이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다.
게으름은 때로 내면의 고통을 처리하지 못한 영혼이 보내는 '비상정지 신호'다. 컴퓨터에 너무 많은 창이 켜져 있으면 마우스가 멈추고 모래시계만 핑글핑글 도는 것처럼, 마음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불안이 가득 찰 때 인간은 행동을 멈추고 멍해진다.
우리는 게으름이라는 껍데기 아래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진짜 자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먼저 고통받는 자로서 깊이 공감해주고 위로해 줄 때, 멈춰있던 영혼의 엔진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멈춰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이 우리를 '속도계'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시속 몇 km로 달리고 있는지, 남들보다 얼마나 빨리 목표 지점에 도달했는지가 인생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속도계의 관점에서 멈춰있는 것은 곧 도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속도계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온도계'를 보신다. "지금 네 마음의 온도는 어떠니? 너무 차갑게 얼어붙지는 않았니? 아니면 너무 과열되어 터질 것 같지는 않니?"
통합적 기독교 상담은 인간을 영, 혼, 육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복합적인 존재로 본다. 몸이 피곤하면 마음이 우울해지고, 영혼이 지치면 삶의 의욕이 사라진다.
겨울철 앙상한 나무를 보며 "너는 왜 이리 게으르게 잎사귀 하나 피우지 않느냐"고 탓하는 사람은 없다. 나무는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봄을 맞이하기 위해 땅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생명을 비축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도 '겨울'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햇살을 쬐며 숨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게으름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창조주의 리듬에 내 삶의 주파수를 맞추는 거룩한 '안식'이다.
『쿵푸팬더』의 포가 무적의 5인방과 똑같은 속도와 방식으로 훈련했다면, 그는 평생 뚱뚱하고 열등감 넘치는 실패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멈춰서 만두를 먹으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을 때, 비로소 "특별한 비법은 없어. 그냥 너 자신일 뿐이야"라는 진리를 깨닫고 진정한 용의 전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다행이다. 게으름은 무찌르고 척결해야 할 적이 아니다. 때로는 나의 타고난 기질이 세상의 속도와 다르다고 알려주는 신호등이며, 때로는 억눌린 두려움과 상처가 살려달라고 외치는 구조요청이다. 속도계의 눈금을 올리려 채찍질하는 것을 멈추자. 대신 내 마음의 온도계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 하나님은 우리가 빨리 달릴 때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쳐 쓰러져 멈춰 있을 때 우리 곁에 앉아 함께 쉬어주시는 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