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번째 질문, '왜 늘 지나고 나서 후회할까?'
“Family comes first.”
“가족이 먼저야.”
『클릭 (Click, 2006)』
얼마 전 스마트폰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아이의 어릴 적 찍어둔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혀 짧은 소리로 아빠를 부르며 달려오는 모습, 얼굴에 온통 아이스크림을 묻히고 해맑게 웃는 모습이 화면 속에 있었다. '맞아, 이때 참 예뻤지' 하며 미소를 짓다가 문득 가슴 한구석이 찌릿해졌다. 영상 속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는 나의 짜증 섞인 목소리 때문이었다. "빨리 안 먹어? 얼른 먹고 자야지!", "조심해! 아빠가 뛰지 말랬지!"
그때의 나는 왜 그토록 조급했을까.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눈망울을 온전히 마주하기보다, 빨리 밥을 먹이고, 빨리 재우고, 내 밀린 업무를 빨리 해야 한다는 생각에 쫓겨 매일 밤 아이들을 윽박질렀다. 뭐가 중요했던 것일까?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졸업을 앞둔 고3 아이들은 한 숨 쉬며 말한다. "선생님, 1학년 때로 돌아가면 진짜 공부 열심히 할 텐데 너무 후회돼요. 그때는 왜 그렇게 놀기만 했을까요?"
우리는 참 어리석다.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그 순간의 가치를 알지 못하다가, 시간이 저만치 흘러가 버린 뒤에야 뒤통수를 치며 탄식한다. 왜 우리는 늘 지나고 나서야 땅을 치며 후회하는 걸까?
영화 『클릭』의 주인공 마이클 뉴먼은 유능한 건축가이자 두 아이의 아빠다. 그는 성공해서 가족을 호강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밤낮없이 일하지만, 늘 직장 상사에게 치이고 아내와의 약속은 어기기 일쑤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인생의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만능 리모컨'을 얻게 된다.
마이클은 이 리모컨으로 꽉 막힌 출근길 차 안, 아내와의 지루한 말다툼, 감기에 걸려 앓아누운 시간 등 삶의 귀찮고 불편한 순간들을 향해 ‘빨리 감기(Fast-Forward)’ 버튼을 누른다. 심지어 승진하기까지 걸리는 몇 달의 시간을 통째로 건너뛰어 버린다. 눈을 떠보니 그는 염원하던 승진을 이루었고, 겉보기엔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했다.
하지만 리모컨은 곧 그의 통제를 벗어난다. 기계가 마이클의 '빨리 감기' 패턴을 학습하여, 조금만 지루하거나 스트레스받는 상황이 오면 자동으로 시간을 건너뛰어 버린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배가 불룩 나온 중년이 되어 있었고, 아내는 떠났으며,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아이들은 훌쩍 커버렸다. 마이클은 인생의 목표(성공)에는 도달했지만, 그곳에 이르는 과정, 즉 삶의 모든 디테일과 소중한 추억들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영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홀든(Robert Holden)은 현대인들이 겪는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 '목적지 중독(Destination Addiction)'이라고 정의했다. 목적지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내가 승진만 하면, 좋은 대학에만 가면,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행복해질 거야"라고 믿는다.
이들에게 '현재(Present)'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참고 견뎌야 하는 지루한 대기실에 불과하다. 풀어 말하면, 우리는 늘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일상을 희생하는 '빨리 감기' 모드로 살아간다. 그러다 막상 그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면, 잃어버린 어제에 대한 거대한 공허함과 후회의 쓰나미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녀들의 집을 방문했다. 언니 마르다는 귀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마음이 분주했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완벽한 식사 대접'이라는 미래(목적지)에 가 있었다. 반면 동생 마리아는 부엌일은 까맣게 잊은 채,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으며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물고 있었다.
혼자 일하느라 화가 난 마르다가 예수님께 불평을 터뜨리자, 예수님은 뜻밖의 대답을 하신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0:41-42)
마르다는 영락없는 영화 『클릭』의 마이클이었다. 그녀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귀한 현재의 순간마저 '식사 준비 완료'라는 목적지를 향해 빨리 감기(Fast-Forward)를 하고 싶어 했다. 만약 예수님의 이 책망이 없었고, 마르다가 끝내 부엌에서 요리만 하다가 예수님을 떠나보냈다면 어땠을까? 훗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마르다는 땅을 치며 후회했을 것이다. "그때 밥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 곁에 앉아 그분의 눈을 한 번 더 바라보고 목소리에 귀 기울일걸!"
우리가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이유는, 마르다처럼 '해야 할 일'과 '미래의 목표'에 쫓겨 정작 내 눈앞에 계신 주님, 혹은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놓쳤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울고 떼쓸 때, 학생들의 철없는 반항에 속이 터질 때, 부부 싸움으로 침묵이 흐를 때 우리는 그 불편한 순간을 '빨리 감기'로 넘겨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 삶은 액기스만 모아놓은 하이라이트 영상이 아니다. 지루하고, 아프고, 견디기 힘든 그 모든 과정 자체가 곧 '삶'이라는 본편이다.
마이클이 빗속에 쓰러져 죽어가며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 "가족이 먼저야(Family comes first)." 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을 잃어버려야 했다. 타임머신이 없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헛된 몸부림이 아니다. 오늘 내 마음의 '빨리 감기' 버튼을 끄고, 마리아처럼 내 눈앞에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에 '재생(Play)' 버튼을 꾹 누르는 것이다.
오늘 퇴근길에는 현관문을 열며 달려 나오는 아이들의 온기를 온전히 느껴보자. 비록 내일 또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후회할지언정, 오늘 밤엔 아이들 머리맡에 앉아 눈을 맞추며 기도해 주자.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길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수하고 후회하고 다시 돌이키는 이 투박한 일상의 과정을 우리와 함께 '재생'하며 걸어가길 원하시니까.
우리가 후회하는 이유는, 그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고 마음이 늘 다른 목적지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며 눈물짓고 있다면, 그 눈물을 닦고 마리아처럼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자.
당신의 진짜 인생은, 마음속 '빨리 감기' 버튼이 멈춘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