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인생질문,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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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이 책의 마지막 챕터거든요 ^^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walls, draw closer,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is the purpose of life."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
어느덧 이 연재의 마지막 글이다. 지난 시간 동안 '공부, 비교, 진심, 결혼, 일, 실패, 게으름' 등 인생을 뒤흔드는 무거운 질문들을 붙잡고 씨름해 왔다. 교목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눈물, 퇴근 후 거울 앞에 선 내 안의 불안감, 그리고 자정이 넘은 시간 유튜브 편집을 마치고 느끼는 자괴감까지. 이 모든 것을 활자로 쏟아내며 나 역시 묻고 또 물었다.
연재가 막바지에 이르자, 학교 제자들과 아이들, 심지어 내 글을 읽은 아내마저 내게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이 험한 세상, 상처받고 흔들리며 살 수밖에 없다면, 이젠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야?"
우리는 늘 완벽한 '정답지'를 원한다. 내비게이션처럼 목적지까지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 막히지 않는 우회도로를 실시간으로 알려주길 바란다. 10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로서 데이터 분석 창을 들여다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시대는 철저히 '알고리즘'의 시대다.
실패할 확률을 0%로 줄여주는 최적화된 경로,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만 보여주는 안전한 세계. 우리는 내 인생에도 그런 알고리즘이 적용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다면 내비게이션의 안내대로, 알고리즘이 세팅해 준 대로 오차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정말 안전하고 행복할까? 실패를 완벽하게 차단한 삶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주인공 월터 미티는 폐간을 앞둔 '라이프' 잡지사에서 16년째 네거티브 필름 인화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평범하다 못해 지루한 일상을 산다. 그의 유일한 낙은 상상 속에서 영웅이 되어 모험을 즐기는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빙하를 맨몸으로 오르고 빌딩 숲을 날아다니지만, 현실의 그는 좋아하는 직장 동료에게 데이트 신청조차 하지 못하는 소심한 남자다. 그는 철저히 통제되고 안전한 자신만의 알고리즘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잡지의 마지막 표지를 장식할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의 25번째 필름이 사라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월터는 필름을 찾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상상 속의 안전한 세계를 박차고 나와, 숀의 발자취를 따라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히말라야로 진짜 모험을 떠난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라이프 잡지사의 모토는 앞서 인용한 대사와 같다.
"세상을 보고, 위험을 무릅쓰고, 벽을 허물고,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월터는 완벽하게 계산된 삶을 포기하고, 거센 파도에 빠지고 화산 폭발을 피해 도망치는 예측 불허의 현실 속으로 뛰어들면서 비로소 진짜 '자신'을 만나게 된다. 풀어 말하면, 삶이란 안전한 방안에서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나가 비바람을 맞으며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그 거친 호흡 자체라는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자. 하나님은 75세의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그런데 목적지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셨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브리서 11:8)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이것은 미친 짓이다. 목적지도, 일정표도, 숙소 예약도 없이 사막으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다. 상상해 보자. 75세의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족회의를 연다. "여보, 우리 이사 가야 할 것 같아." "어디로?"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가다 보면 알려주신대." 사라의 반응이 어땠을까? "당신 정신 나갔어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갔다. 목적지를 모른 채. 언제 도착할지 모른 채. 그저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을 붙잡고.
현대인들은 인생을 '관광객'처럼 살고 싶어 한다. 관광객은 철저한 계획표를 손에 쥐고 있다. 몇 시에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고, 어떤 사진을 찍을지 이미 다 정해져 있다. 만약 일정이 틀어지거나 비가 오면 그 여행은 '망친 여행'이 된다. 분노하고 환불을 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관광객이 아니라 '순례자'로 부르셨다. 순례자에게는 구체적인 일정표가 없다. 그저 부르신 이의 음성 하나에 의지해 걷는 사람이다. 비가 오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법을 배우고, 길을 잃으면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는다.
순례자에게 예상치 못한 고난과 방황은 '망친 일정'이 아니라, 나를 다듬어가는 '거룩한 여정'의 일부가 된다. 아브라함이 위대했던 이유는 그가 완벽한 알고리즘을 찾아내서가 아니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도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허락된 한 걸음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또 다른 순례자가 있다. 야곱. 그는 평생을 속이고 도망치며 살았다.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챘다. 외삼촌 라반에게 속고 또 속으며 20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자신이 속였던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야곱은 두려웠다. 그날 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와 씨름한다.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와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창세기 32:25)
야곱은 이긴다. 하지만 그는 절뚝거리게 된다.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날 밤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신다.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야곱의 절뚝거림을 고쳐주지 않으셨다. 대신 그 절뚝거림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야곱은 완벽한 걸음걸이로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절뚝거리며 들어갔다.
우리는 완벽해져야 쓰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가 다 아물어야, 약점이 다 극복되어야, 그때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절뚝거림을 통해 일하신다. 우리의 약함이 그분의 강함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린도후서 12:9)
풀어 말하면, 우리는 완벽해져서가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 앞에 우리가 두려워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세상이 정해놓은 하나의 기준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알렉산더 토마스와 스텔라 체스는 30년에 걸친 종단 연구를 통해 인간의 기질이 저마다 다름을 증명하며, 교육과 양육의 핵심으로 '조화의 적합성'을 제시했다. 아이가 가진 고유한 기질과 환경의 요구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건강한 성장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환경이 개인의 고유한 기질을 무시하고, 예민하고 까다로운 아이나 적응이 느린 아이에게 무조건 "남들처럼 빨리빨리 해!"라고 강요할 때 발생한다. 이때 적합성은 깨지고, 인간의 영혼은 병들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자 가장 탁월한 상담가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붕어빵 찍어내듯 똑같은 기질로 만들지 않으셨다. 누군가는 활동적이고, 누군가는 내향적이며, 누군가는 변화에 민감하다.
성경을 보라.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기질이 얼마나 다양한가.
다윗은 열정적이고 감정이 풍부했다. 그는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고, 시편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쏟아냈다. 반면 예레미야는 우울하고 예민했다. 그는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고, 눈물의 선지자로 불렸다. 베드로는 다혈질이었다. 칼을 휘두르고, 물 위를 걷다가 빠지고, 예수님을 부인했다가 통곡했다. 반면 바울은 치밀하고 논리적이었다. 그의 서신들은 체계적이고 논증적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질을 뜯어고치지 않으셨다. 대신 그 기질이 하나님 안에서 가장 아름답게 쓰임 받도록 환경을 조율하시고 품어주셨다. 다윗의 열정은 찬양과 예배로, 예레미야의 우울은 회개와 애통의 메시지로, 베드로의 다혈질은 복음을 향한 담대함으로, 바울의 치밀함은 교리를 세우는 신학으로 변화되었다.
풀어 말하면, 다른 사람의 인생을 곁눈질하며 보폭을 맞출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당신에게는 창조주가 허락하신 당신만의 고유한 템포와 리듬이 있다. 그 리듬대로 묵묵히 걷는 것, 그것이 가장 '나다운' 순례의 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묻는 우리에게 성경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세의 이야기, 모세는 40세에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다 살인자가 되어 도망친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보낸다. 양을 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네가 갈 때가 되었다."
모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기 3:11)
40년 전, 모세는 자신감 넘쳤다. 왕궁에서 자랐고, 학문을 배웠으며,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40년의 광야는 모세를 비웠다. 자신감을, 교만을, 조급함을. 그리고 그 빈자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광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 같은 그 시간을, 세상이 나를 잊어버린 것 같은 그 시간을. 하지만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광야는 실패가 아니다. 준비의 시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시는 공방이다.
월터 미티가 히말라야 높은 산에서 마침내 사진작가 숀 오코넬을 만났을 때, 숀은 그토록 기다리던 눈표범이 나타났음에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왜 찍지 않느냐고 묻는 월터에게 숀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때는 사진을 찍지 않아. 이 아름다운 순간을 카메라에 방해받지 않고, 그냥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거든. 바로 여기, 여기에."
우리는 늘 다음을 준비한다. 다음 학기, 다음 직장, 다음 단계. 그러다 보면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오늘 내게 주어진 햇살을, 오늘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기적을.
과거의 상처에 발목 잡히거나 미래의 불안을 앞당겨 쓰며 살지 말자. 대신, 오늘 아침 내게 주어진 식탁의 따뜻함에 감사하자. 교실과 일터에서 만나는 까다로운 사람들에게 미소 한번 건네보고, 집으로 돌아가 나를 기다리는 가족의 체온을 온전히 느껴보자.
알고리즘의 좁은 방을 나와, 상처받을 각오를 하고 사람과 세상 속으로 뛰어들자. 그 거칠고 투박한 일상의 순간순간 속에 머무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걸음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창조주의 손을 굳게 쥐는 것.
연재를 마치며,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할까?
거창한 비전이나 10년 뒤의 완벽한 청사진이 없어도 괜찮다. 내비게이션의 도착 예정 시간이 자꾸만 늘어난다고 초조해할 필요도 없다. 관광객처럼 완벽한 일정표를 쥐고 살려 하지 말고, 순례자처럼 오늘 허락된 한 걸음을 묵묵히 내딛자. 야곱처럼 절뚝거리며 걸어도 괜찮다. 모세처럼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도 괜찮다. 아브라함처럼 목적지를 모른 채 떠나도 괜찮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신뢰를 원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그 약속 하나만 붙잡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 험한 세상을 유쾌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이유로, 그것이면 정말 충분하지 않은가.
그동안 『인생질문』 스무 편의 글을 함께 읽고, 울고, 호흡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람이지만, 저 역시 매일 흔들리고 실수하는 한 명의 평범한 순례자일 뿐입니다. 비록 이 연재는 여기서 마침표를 찍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넓은 도화지 위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남은 여정에 평안이 가득하기를, 나쁜 머리 게으른 일상이지만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