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인생질문, '행복할 수 있을까?'
"I'm going to live every minute of it."
"난 매 순간을 살 거야."
『소울 (Soul, 2020)』
SAT, 수능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교 교정은 묘한 공기로 가득 차 있다. 해방감에 젖어 복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가채점표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 있는 아이들도 있다. 교실로 찾아와 "목사님, 저 망했어요. 이번 생은 끝난 것 같아요."라고 울먹이는 아이를 달래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고작 19년 산 인생인데, 시험 하나로 '이번 생'의 행복이 결정되었다고 믿는 이 잔혹한 현실이 아프다.
아빠로서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이 녀석들이 나중에 커서 밥벌이는 할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불쑥 올라온다. 우리는 늘 행복을 '나중'의 문제로, 혹은 '조건'의 문제로 치환한다. "대학만 가면 행복해질 거야.", "취업만 하면, 결혼만 하면, 집만 사면..." 행복을 인질로 잡고 오늘을 희생시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배운 생존 방식이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그 조건들이 충족되면, 우리는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그 목표 지점에 깃발을 꽂는 순간,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는 걸까?
영화 『소울』의 주인공 조 가드너는 기간제 음악 교사다. 그의 꿈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최고의 재즈 클럽에서 연주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시시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진짜 인생'은 무대 위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왔다. 동경하던 밴드와 연주할 기회를 얻은 날, 너무 기뻐서 앞을 보지 않고 걷다가 맨홀에 빠져 죽음의 문턱에 이른다.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떨어진 조는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친다. "내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고! 나는 아직 내 목적을 이루지 못했어!"
조 가드너에게 행복은 '무언가가 되는 것'이었다.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삶은 실패작, 즉 불량품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만난 영혼 '22'는 지구에 가기 싫어한다. 위인들의 멘토링도 다 실패한 시니컬한 영혼이다. 그런데 조의 몸을 통해 지구를 체험하게 된 22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은 너무나 사소하다.
길거리에서 먹은 피자 한 조각의 맛, 지하철 환풍구에서 불어오는 바람, 나무에서 떨어지는 씨앗 하나가 손바닥에 닿는 느낌. 22는 말한다. "난 여기서 그냥 걷는 게 좋아. 하늘을 보는 게 좋아." 조는 답답해하며 핀잔을 준다. "그건 인생의 목적이 아니야. 그냥 사는 거지."
여기서 우리는 뼈 때리는 질문을 마주한다. 목적을 이루는 것만이 가치 있는 삶일까? 그냥 사는 건 행복이 아닐까?
우리는 흔히 '소명'이나 '꿈'을 거창한 성취로 오해한다. 나 또한 강단에서 아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야. 하나님이 너희를 향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셔."라고 설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이 말을 "아, 내가 의사가 되거나 유튜버로 대박이 나야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구나."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영화 후반부, 조 가드너는 그토록 원하던 꿈의 무대에 선다. 성공적인 연주를 마친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다. 그런데 공연장 뒷문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허함을 느낀다. "내일은 뭐 하죠?"라고 묻는 그에게 밴드 리더는 말한다. "내일도 똑같이 연주하는 거지."
그때 조는 깨닫는다. 자신이 좇던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거창한 무대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매일 마주하던 일상 속에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인간을 만들고 나서 하나님이 하신 첫 번째 말씀을 기록한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엄청난 업적을 세웠나? 아이폰을 발명하거나 베스트셀러를 썼나? 개뿔 아무것도 안 했다. 그냥 하나님이 만드신 숨을 쉬고, 과일을 먹고, 거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로 "심히 좋다"라고 하셨다.
풀어 말하면, 우리의 행복은 '성취'라는 결과물에서 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 그 자체, '살아있음'을 누리는 과정에 있다.
세상은 자꾸 우리를 제품으로 취급한다. "너의 용도는 뭐야? 너의 기능은 얼마나 뛰어나?" 기능이 떨어지면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가스라이팅 한다. 그래서 우리는 쉴 새 없이 스펙을 업데이트하며 나를 증명하려 애쓴다. 『소울』의 조 가드너처럼 "이것만 해내면 내 인생은 의미 있어질 거야"라고 유예된 행복을 좇는다.
하지만 우리는 작품이다. 박물관에 걸린 모나리자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거기 걸려 있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터치가 묻어 있어서 가치 있는 거다. 길가에 핀 꽃이 "나 오늘 꿀 10kg 못 모으면 어떡하지?"라고 우울해하는 거 봤나? 공중의 새가 "내일 집값 떨어지면 어떡하지?"라며 불면증에 시달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26). 풀어 말하면 이런 뜻이다. "얘들아, 너희는 그냥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어. 왜냐하면 너희는 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니까."
학교에서 상담했던 그 울먹이던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리고 오늘 퇴근길에 만날 내 아이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다. "네가 1등급을 받지 못해도, 네가 인서울 대학에 가지 못해도, 너는 여전히 소중해. 네 행복은 성적표에 찍힌 숫자에 있지 않아. 오늘 친구와 먹은 떡볶이의 매콤함 속에, 쉬는 시간에 들은 음악 속에,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눈빛 속에 이미 행복은 녹아 있어."
조 가드너는 영화 마지막에 다짐한다. "I'm going to live every minute of it." (난 매 순간을 살 거야.)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을 얻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지금, 여기'를 놓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거창한 목적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 오늘 맛있는 밥을 먹고, 파란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행복은 쟁취해야 할 트로피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일상 곳곳에 숨겨두신 보물찾기 쪽지다. 그러니 오늘, 너무 애쓰지 말고 그냥 살아보자. 그냥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위대한 소명이다.
행복은 조건이 완성될 때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다.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선물이다. 제품으로서 기능하기를 멈추고, 작품으로서 오늘을 만끽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살아있는 이 순간이 기적이고, 행복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