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인생질문, '고통은 언제 끝날까?'
"Hope is a good thing, maybe the best of things, and no good thing ever dies."
"희망은 좋은 거죠. 아마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좋은 건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1994)』
며칠 전 치과에 다녀왔다.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 그리고 의사 선생님의 무심한 한마디. "조금 시릴 수 있어요." 말이 '조금'이지, 신경을 건드리는 그 찌릿한 고통이 찾아올 때면 의자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속으로 수십 번을 외친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1분이 1년 같다는 말은 아마 치과 의자에 누워본 사람이 만든 말이 분명하다.
치료가 끝나고 욱신거리는 턱을 부여잡고 나오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고통도 이 치과 치료와 비슷하지 않을까? 예고 없이 찾아오고, 생각보다 훨씬 아프며, 무엇보다 도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막막함.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교회에서 성도들의 눈물을 마주하다 보면 늘 듣는 질문이 있다. "목사님, 선생님, 이 고통은 언제 끝날까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저를 이 터널 속에 그냥 두시는 거죠?" 그들의 눈동자는 흑백 TV의 노이즈처럼 흔들린다. 사업 실패, 가족의 질병, 깨어진 관계, 혹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황장애. 마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철 빗줄기처럼 고통은 우리 인생을 축축하게 적시고, 때로는 아예 잠겨버리게 만든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질범들만 모인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다. 엘리트 은행가였던 그의 삶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간수들의 폭력, 동료 죄수들의 괴롭힘, 그리고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회색빛 벽 안에서 그는 무려 19년을 버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앤디가 탈옥을 감행하는 장면이다. 그는 천둥 번개가 치는 밤, 작은 조각칼로 19년 동안 파낸 벽을 뚫고 하수구로 들어간다. 그 하수구는 500야드, 약 450미터의 오물로 가득 찬 파이프였다. 앤디는 그 더럽고 냄새나는 똥물 속을 기어서 통과한다. 숨을 쉴 수도,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는 그 좁은 관 안에서 그가 멈추지 않고 기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파이프 끝에 '자유'가 있다는 희망, 아니 확신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왜 자유로 가는 길은 하필이면 똥물일까? 그냥 벽을 뚫었더니 푸른 초원이 나오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우리 인생이 그렇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앤디가 기어가야 했던 500야드의 오물 파이프와 같다. 피하고 싶고, 토하고 싶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그 길. 하지만 그 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나'라는 자유가 있다.
풀어 말하면, 고통이 끝나는 순간은 고통 자체가 사라지는 시점이 아니다. 그 오물 파이프를 기어 나와 빗속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자유를 만끽하는 앤디처럼, 고통을 통과해 낸 '더 단단해진 나'를 만나는 순간이다.
성경 속 요셉의 인생을 보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채색옷을 입고 꿈을 꾸던 요셉. 그러나 형들의 질투로 노예로 팔려가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힌다. 17세 소년이 30세 총리가 되기까지, 13년이라는 시간은 철저한 '쇼생크'였다.
요셉이 감옥 차가운 바닥에서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까? "하나님, 저한테 꿈을 주셨잖아요. 해와 달과 별이 절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현실은 왜 똥물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요셉이 그 13년 동안 하나님을 원망했다거나, 자포자기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세기 39:2)"라고 기록한다. 감옥에 있는데 형통하단다. 세상의 기준인 소유가치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존재가치로 보면 말이 된다. 요셉은 그 고통의 시간 동안 징징대는 철부지 꼬맹이에서, 한 나라를 경영하고 훗날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을 용서할 수 있는 '거인'으로 빚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은 우리를 부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다. 제품은 충격을 받으면 깨지지만, 작품이 되기 위한 쇠붙이는 불 속에 들어가고 망치로 두들겨 맞을수록 단단해진다. 대장장이는 쇠가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다. 그 쇠 안에 숨겨진 명검을 끄집어내기 위해 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 때로는 침묵하시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너는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이 아니야. 너는 내가 만드는 유일한 작품이야. 그래서 이 불이 필요하고, 이 망치질이 필요해."
요셉은 훗날 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났을 때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창세기 50:20) 이 고백이 바로 요셉의 고통이 끝나는 지점이다.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 고통이 끝난 게 아니다. 자신의 지난 아픔과 상처가 단순한 재수 없음이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고 해석해 냈을 때, 비로소 그의 고통은 끝났다. 아니, 완성되었다.
고통은 언제 끝날까? 내가 겪은 이 아픔이 더 이상 나를 찌르는 독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약재료가 되었음을 깨달을 때 끝난다. 앤디 듀프레인이 탈옥 후 '지구상에서 가장 파란 바다'가 있는 멕시코의 지와타네호로 떠난 것처럼, 우리도 고통이라는 파이프를 통과해 우리만의 지와타네호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 똥물 속을 기어가고 있는 당신에게 감히 말하고 싶다. 멈추지 마라. 그 냄새에 질식해 주저앉지 마라. 지금 당신이 느끼는 그 고통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당신이 제품이 아닌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신음소리다. 레드가 앤디의 편지를 읽으며 했던 말처럼, "희망은 좋은 것이고, 좋은 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의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다. 반드시 별이 되어 빛날 것이다.
고통은 상황이 좋아진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 고통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상처를 통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힘을 얻었을 때 비로소 끝이 난다. 우리는 오물을 뒤집어쓴 채 죽을 운명이 아니다. 비를 맞으며 자유를 외칠, 하나님의 걸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