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논리

[인생질문]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읽고 쓰기 일곱번째

by 인생질문

하나님의 선택, 특권인가 섬김인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만 특별히 선택하신다고? 그건 불공평해!"

현대인들이 기독교 교리 중에서 가장 거부감을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선택'(election) 교리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만 부르시고, 왜 이스라엘만 택하시며, 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고 말씀하시는가? 이것은 종교적 엘리트주의가 아닌가? 신의 편애가 아닌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히 신학적 호기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평등 이념에 익숙한 현대 사회에서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가 차별과 특권의식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에서 특별전형, 취업에서 연고주의,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공정한 특혜들을 목격하며 살아온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택'도 그런 종류의 부당한 차별로 들릴 수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유독 도드라진 아이들의 차별, 특권, 편견의식을 보게 된다. 어떤 친구가 다른 친구와 급식을 함께 먹는 것 만으로 자신은 차별을 받고 있다고 여기는 세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다른 친구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내가 친한 친구와 했다고 해서 왕따를 당한다고 주장하는 미약한 세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나를 중심으로 뭔가 이뤄지지 않는 것을 모두 편견, 차별, 특권으로 매도하는 시대 현상이.


선택받은 자의 착각

문제는 교회 안에서조차 이 교리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이야", "우리만이 구원받은 거야"라는 식의 우월감과 배타성으로 선택 교리가 왜곡되었을 때,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독선이 되고 만다. 중세 십자군 전쟁에서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라고 외치며 이슬람을 정복하려 했던 것,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남아공 백인들이 자신들을 "선택받은 민족"이라 여겼던 것, 이런 역사의 어두운 면들이 선택 교리에 대한 오해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러나 뉴비긴은 성경을 다시 들여다보라고 제안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보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명을 보라. "열방의 빛"(사 49:6)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보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는 것이다.


성경적 선택은 배타적 특권이 아니라 포용적 섬김이다. 선택받은 자는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끌어올리기 위해 선택받는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는 선언 뒤에 바로 이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보라. "그의 기이한 빛에 불러내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선교 전략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시에 부르지 않으시고 이렇게 단계적으로, 선택적으로 일하시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한계 때문인가, 아니면 더 깊은 지혜 때문인가?


뉴비긴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추상적인 진리를 하늘에서 내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공동체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신다. 사랑은 본래 인격적이고 관계적이다. 하나님은 프로그램이 아닌 사람을 통해, 시스템이 아닌 관계를 통해 일하신다.


예수님께서도 72명을 보내실 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눅 10:2)라고 하셨다. 전 세계를 순식간에 변화시킬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만지고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하여 온 세계로 퍼져가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 말이다.


이것은 마치 전염병의 확산과 비슷하다. 바이러스가 모든 사람을 동시에 감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염된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듯이, 복음도 복음에 '감염된'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단, 바이러스와 다른 점은 이 '감염'이 파괴가 아닌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선택 이해

한국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이러한 선택 교리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라는 과도한 민족주의적 해석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위로가 되었지만, 때로는 다른 나라나 민족에 대한 우월감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선택의 의미를 보여준 사례들도 많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주었듯이, 한국 교회도 이제 세계 선교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나라에 파송된 한국 선교사들의 헌신은 "받은 복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선택의 의미임을 보여준다. 또한 북한 동포들을 위한 기도와 통일 준비,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섬김도 같은 맥락이다.


일상 속의 선택과 책임

선택 교리는 거창한 민족사나 세계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각자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 이 교회의 구성원이 된 것, 이 직장에서 일하게 된 것, 이 가정의 일원이 된 것,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가 있는가?


만약 후자라면, 이것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동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것, 가정에서 희생적으로 섬기고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것, 지역사회에서 이웃을 돌보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 이런 일상적 섬김이야말로 선택받은 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받고, 어떤 사람은 찬양으로, 어떤 사람은 구제와 봉사로, 어떤 사람은 기도와 중보로 부름받는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라 분업이며, 우열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몸의 지체"로 설명한 것처럼, 각자의 은사와 역할이 다르지만 모두가 한 몸을 이루어 함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해 나간다.


보편적 사랑, 특수한 방법

결국 하나님의 선택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보편성), 특정한 사람들을 통해 그 사랑을 나타내신다(특수성).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을 통해 그 구원을 전파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들을 모두 동일하게 사랑하지만, 각 자녀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대하는 것과 같다. 첫째에게는 책임감을, 막내에게는 자유를, 중간 자녀에게는 균형을 가르치지만,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선택도 그렇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이며, 편애가 아니라 역할 분담이다.


질문

뉴비긴의 통찰은 오늘 우리 각자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우연히 이 시대에 태어나 우연히 복음을 듣고 우연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과 계획 속에서 선택받고 부름받은 사람인가?


만약 후자라면, 그 선택과 부르심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나만의 구원과 축복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인가? 내가 받은 은혜와 복을 독점할 것인가, 아니면 흘려보낼 것인가?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도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이 지역과 사회, 그리고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 기지 역할을 하기 위해서인가? 우리의 예배와 교제, 교육과 봉사가 내부를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외부를 향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선택은 특권이 아니라 섬김이다.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 선택받았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길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부름받은 교회의 사명이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선택받은 자의 참된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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