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질문]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읽고 쓰기 여섯번째
믿음은 개인의 마음에만 있어야 해. 역사는 과학이야.
우리는 이런 생각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계몽주의 이후 서구 사회가 걸어온 긴 여정의 결과다. 자연과 초자연, 사실과 가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철저히 분리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우리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대학 강의실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하면 당황스러운 침묵이 흐르고, 직장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말하면 개인적 신념으로 치부되는 현실은 이러한 분리가 얼마나 견고하게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준다.
현대의 역사학과 과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전제로 하여 신의 개입을 애초에 가정하지 않는다. 그 결과 '하나님이 행하셨다'는 말은 종교적 상징이나 개인적 신앙고백의 영역으로 밀려났고, 공적인 설명이나 학문적 해석에서는 설 자리를 잃었다. 칸트가 현상계와 본체계를 나눈 이후, 우리는 하나님을 역사의 무대 밖으로 정중히 모셔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서 시작한다. 복음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담대한 선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지 종교적 상징이나 신화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뉴비긴은 이 고백이 갖는 의미와 현대 사회가 그것을 체계적으로 외면하는 방식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한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반문한다. '그걸 왜 질문에? 그것도 치열하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자 나 또한 이렇게 무엇인가를 정리해나가고 있다. '생각좀하고 살자'라고 외치며.
사실인가, 비유인가
기독교 복음의 중심에는 관념이 아닌 사건이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플라톤적인 의미로 풀어 말하면 "하늘의 진리를 보여주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실제로 "무덤이 비었고, 제자들이 변화되었으며, 역사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구체적인 사건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점을 명확히 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되고 또 너희 믿음도 헛되며"(14절). 바울에게 부활은 신앙의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복음 전체가 서거나 넘어지는 토대였다.
그러나 현대 신학은 종종 다른 길을 선택했다. 불트만 같은 신학자들은 케리그마(선포)와 역사를 분리시키면서, 부활의 역사성보다는 그것이 갖는 실존적 의미에 집중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부활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의미였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접근을 더욱 환영한다. "중요한 건 의미지, 사건 자체는 아니야"라는 태도로 종교를 개인의 가치관이나 윤리적 지침 정도로 축소시킨다.
하지만 뉴비긴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의미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얼마나 멋진 질문인가? 생각하고 싶게 만드는 질문이다.) 만약 십자가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이 전하는 의미는 무엇에 기초하는가? 허공에 떠 있는 관념일 뿐이지 않은가? 만약 예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종교적 신념 체계에 불과하며, 플라톤의 이데아나 불교의 열반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추상적 관념이 아닌 구체적 사건, 즉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하나님의 행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행하신다
우리는 흔히 신의 행위와 인간의 역사를 분리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신은 마음속에, 역사는 인간의 영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현대인의 기본 전제가 되었다. 18세기 이신론(Deism)은 이러한 분리를 체계화했다. 하나님을 우주의 시계공으로 비유하면서, 세상을 만들고 태엽을 감은 후에는 그 작동에 개입하지 않는 존재로 묘사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이러한 차가운 이신론의 신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다.
뉴비긴은 기독교 신앙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안에서 적극적으로 일하신다'는 고백 위에 서 있음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한복판에서, 당시의 정치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일어났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이집트 제국의 정치적 격변과 맞물려 있었고, 바로의 궁정과 홍해의 지리적 조건이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다. 예수의 탄생 역시 로마의 인구조사, 헤롯의 통치, 다윗의 혈통이라는 복잡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은 단순한 역사적 정보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복음이 시공을 초월한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철학적 원리나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구체적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주어진다. 이것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나 철학 체계와 구별 짓는 결정적 특징이다. 불교가 역사를 벗어나려 하고, 그리스 철학이 시간을 초월한 진리를 추구한다면, 기독교는 역사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다.
역사비평과 성경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 19세기 이후 발전한 역사비평학은 성경을 다른 고대 문서와 동일한 방법론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초자연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전히 인간적 요인만으로 성경의 기록을 설명하려 했다. 이러한 접근에 따르면 예수는 한 명의 카리스마 있는 유대인 랍비였고, 부활은 슬픔에 빠진 제자들의 집단 환상이었으며, 기적은 후대의 신화적 첨가물이었다.
그러나 뉴비긴은 이러한 접근의 전제 자체를 문제 삼는다. 과연 초자연을 배제한 역사 서술이 더 '객관적'인가? 사실 모든 역사 서술에는 해석의 틀이 작동한다.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무엇을 부차적으로 여길 것인가, 어떤 인과관계를 설정할 것인가는 순전히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자의 전제와 세계관에 달려 있다. 계몽주의적 이성이 절대적이고 중립적인 기준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 역시 특정한 신념 체계 위에 서 있지 않은가.
기독교는 하나님이 특정한 사건들을 통해 당신의 목적을 계시하셨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해석된 역사다. 출애굽 사건을 단지 셈족 노예들의 집단 탈출로 볼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은 그 사건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길을 보았다. 십자가를 로마 제국의 정치범 처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초대 교회는 거기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 사랑을 보았다. 이러한 해석은 자의적이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 전체, 즉 창조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성령과 해석의 공동체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해석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가? 개인의 이성인가, 학문적 전문가들인가, 아니면 교회의 전통인가? 뉴비긴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신앙 공동체를 해석의 주체로 제시한다. 교회는 단순히 과거의 교리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곳이 아니다. 살아계신 성령의 인도 아래 하나님의 행하심을 분별하고, 성경의 증언에 비추어 현재의 사건들을 해석하며, 그 의미를 세상에 증언하는 해석학적 공동체다.
이것은 주관주의나 상대주의가 아니다. 교회의 해석은 네 가지 기준에 의해 검증된다. 첫째, 성경의 증언과 일치하는가? 둘째, 교회의 전통과 조화를 이루는가? 셋째, 이성적으로 모순이 없는가? 넷째, 실제 경험과 부합하는가? 무엇보다 모든 해석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중심 사건에 비추어 평가된다. 또한 이 해석은 단지 지적 작업에 그치지 않고 삶의 변화와 공동체의 실천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정의를 위한 투쟁, 화해를 위한 노력, 사랑의 실천이 없는 해석은 공허한 관념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시는가?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성경 시대는 특별했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은 이미 끝났고, 이제는 인간의 책임만 남은 것 아닌가?"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역사를 과거형으로만 고백한다. 그러나 뉴비긴은 이러한 태도야말로 현대의 이원론에 굴복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성령은 교회를 통해 지금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고 계신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이것이 분명해진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것, 야만족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 중세의 대학이 설립된 것,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 이 모든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다. 물론 교회의 실패와 타협도 있었다.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식민주의에 가담한 어두운 역사를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가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가? 오히려 이는 심판과 회개, 그리고 갱신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방식을 보여주지 않는가?
현대에 와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된다. 20세기 후반 동유럽 공산주의의 몰락 과정에서 교회가 수행한 역할,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교회 성장, 아프리카가 선교의 주체로 부상하는 현상이 모든 것을 단순히 사회학적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중독에서의 해방, 깨어진 관계의 회복, 절망 속에서 찾은 소망, 무의미한 삶에서 발견한 소명, 이것들이 단지 심리적 현상일 뿐인가, 아니면 성령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 증거인가?
여기서 뉴비긴은 '선택'(election)이라는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주제로 나아간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동시에 부르시지 않고, 특정한 사람과 민족, 공동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아브라함의 선택, 이스라엘의 선택, 그리고 교회의 선택이 그것이다. 이러한 특수성은 현대의 보편주의적 감수성에는 불편하게 느껴진다.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계시하지 않으시는가? 이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적 선택 개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임을 알 수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라는 베드로의 선언에서 보듯, 선택받은 자는 섬기도록 부름받은 자다. 아브라함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는 약속과 함께 선택받았다. 이스라엘은 "열방의 빛"이 되라고 선택받았고, 교회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후 5:18)을 위해 세워졌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 방식이다. 추상적 진리를 온 세계에 동시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공동체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신다.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꾸는 혁명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하여 온 세계로 퍼져가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이것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인격적이고 관계적이다. 하나님은 프로그램이 아닌 사람을 통해, 시스템이 아닌 관계를 통해 일하신다.
일상 속의 섭리
뉴비긴의 통찰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의 일상으로 확장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특별한 종교적 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계속된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 가정에서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 이 모든 일상적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그분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통로가 된다.
루터가 강조한 '소명'(Beruf) 개념이 여기서 중요해진다.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원의 담을 넘어 모든 정당한 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선언했다. 농부의 밭갈이, 교사의 가르침, 의사의 치료, 예술가의 창작, 이것들이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일까? 아니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돌보시고 새롭게 하시는 거룩한 통로일까? 우리의 일상적 수고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고, 이웃을 섬기며, 새 창조를 준비하는 거룩한 행위다.
이러한 관점은 성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극복하게 한다. 주일 예배만 거룩하고 평일의 일은 세속적이라는 구분은 성경적이지 않다. 오히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바울의 권면처럼,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될 수 있다. 직장에서의 정직한 노동, 가정에서의 희생적 섬김, 사회에서의 정의로운 참여,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거룩한 사역이다.
진리는 역사다?! 역사는 진리다?!
기독교 진리의 독특성은 그것이 추상적인 개념이나 개인적 깨달음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다는 데 있다. 요한복음은 이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라는 놀라운 선언으로 표현한다. 영원한 로고스가 시간 속으로 들어왔고, 절대적 진리가 상대적 역사의 옷을 입었다. 진리 자체이신 분이 먼지 나는 팔레스타인 길을 걸으셨고,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먹으셨다.
이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는 스캔들이었다. 그들에게 진리란 변화하는 현상계를 넘어선 영원불변의 이데아였기 때문이다. 유대 종교인들에게도 거리끼는 것이었다. 초월적인 야훼 하나님이 한 인간과 동일시된다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절대자가 상대적 역사에 갇힌다는 것, 무한자가 유한한 인간이 된다는 것,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 및 철학과 구별하는 결정적 특징이다. 하나님은 멀리서 인간에게 교훈을 던지는 분이 아니라, 직접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와 함께 걸으시는 분이다. 진리는 명제가 아니라 인격이며, 교리가 아니라 만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성은 우리의 신앙에 구체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명상이나 신비 체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현재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만난다. 예배당에서의 거룩한 순간뿐 아니라 일터에서의 수고를 통해, 기도의 골방에서뿐 아니라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 종교적 황홀경에서뿐 아니라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다.
현재적 부르심
그래서 복음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의 부르심이다. "너는 이 역사의 부르심에 응답하겠는가?"라는 질문은 2천 년 전 갈릴리 해변에서만 울린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도 계속 울리고 있다. 이것은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거나 미래를 막연히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처한 구체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공동체다. 주일 예배는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부활의 증인들이 모여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축하하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우리가 함께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는 것은 개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미리 맛보고 증언하기 위함이다. 성찬은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기념 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실제로 참여하고 새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은혜의 수단이다.
이러한 교회의 예배와 삶은 세상을 향한 증언이 된다. 인종과 계급, 성별과 나이를 초월하여 한 식탁에 둘러앉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분열된 세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정의를 추구하는 교회의 실천은 하나님의 통치가 단지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을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리고 그 진리는 2천 년 전 유대 땅에 묻혀 있는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며, 교회와 함께 그리고 교회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고 계신다. 팬데믹의 고통 속에서도,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경제적 불평등의 현실 속에서도, 그리고 일상의 권태와 무의미 속에서도 부활의 능력은 계속해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뉴비긴의 질문은 오늘 우리 각자에게 던져진다. 당신은 하나님을 어디서 만나는가? 단지 내면의 평안에서만인가, 아니면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만나는가? 당신의 신앙은 개인의 취향이나 심리적 위안에 그치는가, 아니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적 증언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은 아름다운 과거의 추억 속에만 계신가, 아니면 오늘도 역사의 주인으로서 일하고 계신가?
복음은 우리를 과거로 돌아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고 부른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 속에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