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 계시, 전통

[인생질문]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읽고 쓰기 다섯번째

by 인생질문

복음은 어떻게 공적 진리가 되는가?

세상은 이제 진리를 말하는 데 매우 신중하다. "이게 진리다"라고 말하는 순간, 누군가는 불편해하고 또 누군가는 불쾌해한다. 진리는 각자에게 다르고, 믿음은 개인의 취향일 뿐이며, 과학만이 유일한 '보편 언어'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진리로 설 수 있는가? 인류는 보편적으로 인류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이성, 계시, 경험의 렌즈를 통해 생각해보자.


첫째, 이성은 중립이 아니다

이성은 오래전부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으로 간주되어 왔다. 계몽주의 이후 서구 세계는 "생각하는 인간"을 중심에 놓았고, 종교적 권위나 전통은 의심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성만이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공통분모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성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모두 특정한 문화와 언어, 공동체 안에서 자라온 사고의 열매들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서구인들에게는 '개인의 자유'가 당연한 가치이지만, 전통적인 동양 사회에서는 '공동체의 조화'가 더 중요한 가치였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더 '이성적'인가? 단순한 질문이다. 답은 없다. 각자가 속한 문화적 토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학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과학자들도 특정한 패러다임 안에서 연구한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본 것을 당시 학자들이 '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에게는 갈릴레이의 관찰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 틀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 또한 인간이 보는 것을 통해 믿어지는 파면적 결과에 불과하다.


둘째, 계시는 선택지가 아니다

현대 사회는 종교를 마트의 상품처럼 만들어버렸다. 수많은 종교와 영성들이 진열대에 놓여 있고,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 담는다. 계시는 더 이상 '받는 것'이 아니라 '고르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선택 사항이 아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풀어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이며 복음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사실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생각해보라. 이것은 철학적 관념이나 도덕적 가르침이 아니다.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사렛 마을에서. 이 구체성이 기독교 계시의 독특함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계시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시는 공동체를 통해 전해지고, 공동체 안에서 이해되고, 공동체의 삶으로 증명된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진리를 증언하는 공동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며 종종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왜 꼭 교회에 나가야 하나요? 혼자서도 믿을 수 있지 않나요?" 계시는 공동체적 사건이며,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자라난다. 혼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함께 볼 수 있고,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단은 이것을 거부한다.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고 하고, 나 혼자 잘 산다고 외치는 세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셋째, 경험은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 시대는 경험을 중시한다. "나는 이렇게 느꼈다", "내게는 이것이 진실이다"라는 말에 무게를 싣는다. 개인의 경험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경험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같은 경험도 어떤 틀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어려움을 겪을 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신다"고 해석한다. 교육 현장에서 이런 일을 자주 본다. 같은 성경 구절을 읽고도 학생들은 각자 다른 것을 느낀다. 어떤 학생은 위로를 받고, 어떤 학생은 도전을 받으며, 어떤 학생은 의문을 품는다. 이것이 나쁜 것인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적 분별과 성경적 틀이다.


초대교회를 보자.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그 경험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비추어 분별했고, 공동체의 지혜를 모아 판단했다.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들을 때도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 이것이 그러한가" 살폈다고 했다. 경험은 소중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손길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경험은 말씀의 빛 아래서, 공동체의 분별 가운데서 올바로 해석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진리는 공동체 속에서 검증된다

과학은 전문가 집단의 합의를 통해 '객관적 사실'을 확립한다. 그런데 왜 신앙은 항상 '주관적'이라고 치부되는가? 생각해보자. 물리학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할 때, 그들은 학계의 검증을 거친다. 동료 평가, 실험의 재현, 이론의 정합성 검토 등을 통해 그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그리고 과학 공동체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 된다.


이처럼 교회도 마찬가지다. 2천 년의 역사를 통해 교회는 진리를 분별하고 전수해왔다. 신경들과 신조들, 공의회의 결정들, 신학적 전통들은 모두 공동체적 분별의 결과다. 이것은 단순한 인간적 합의가 아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교회도 실수를 했다. 때로는 시대정신에 휩쓸렸고, 때로는 복음의 본질을 놓쳤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교회가 항상 다시 복음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그랬고, 수많은 부흥 운동들이 그랬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자기 교정 능력이며, 성령의 역사다.


믿음은 완전한 진리, 통합적 앎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가? 이성으로만?계시로만? 경험으로만? 아니다. 믿음은 이 세 가지의 통합적 앎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중심에 둔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인식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 계시는 우리의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동시에 우리의 경험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한다. 다만 그 경험은 말씀과 공동체의 분별을 통해 올바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우리의 신앙은 건강해진다. 이성만 강조하면 차가운 정통주의가 되고, 경험만 강조하면 감정주의에 빠진다. 계시만 강조하면서 이성과 경험을 무시하면, 우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신앙이 된다. 오늘의 아이들과 청년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구글 검색 한 번이면 모든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시대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목말라하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진리다. 청소년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그게 진짜인지 어떻게 알아요?" 이들은 진정성을 갈구한다. 가짜뉴스와 조작된 이미지들 사이에서 진짜를 찾고 싶어 한다.


여기서 교사, 부모, 목회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는 단순히 교리를 주입하는 사람이 아니다. 진리를 함께 탐구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의심과 질문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신앙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한다. 신앙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배우고, 함께 섬기는 가운데 진리를 더 깊이 알아간다. 교회는 단순한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진리를 살아내는 공동체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은 복음을 사적인 영역으로 밀어내려 한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개인의 취향이나 심리적 위안거리가 아니다. 복음은 온 세상을 위한 좋은 소식이다. 복음이 공적 진리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장 깊은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왜 여기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준다. 죄와 구원, 정의와 사랑, 희망과 완성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주장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검증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 입증된 진리다. 박해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고, 조롱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해지고 더 널리 퍼졌다.


가장 중요한 것을 결국 진리는 단순히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을 통해 증명되고 전파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복음을 변증한다 해도, 우리의 삶이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을 변화시킨 것은 그들의 철학적 논증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보여준 사랑과 희생, 용서와 섬김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보라, 저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가!"라는 감탄이 나왔다.


그 감탄안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 안에 이성, 계시 그리고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다.




교사이자, 목사로 학교에서 20년 가까이

가르치고 읽고 쓰고 듣고 살아갑니다

프로질문러, 인생질문 작가 유찬호

biblestory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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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머리 게으른 일상이지만 최선을 다해 답을 해보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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