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PART 1. 살아있음. 1장 살아있음

by 라이프퀘스트 한

PART 1 살아있음

1장 살아있음


나는 왜 이렇게 살아 있는가?


이 질문은 살아가는 동안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통, 예상치 못한 시련,

구석구석에 쌓인 아픈 흔적들이

어느 순간 한 문장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라는 고뇌는

집요하게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들었습니다.


결국 고통은 더 근원적인 자리로 이끌었고

‘나는 무엇인가?’라는

진실의 문 앞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생각과 지식으로는

도무지 닿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막막하게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버틸 힘조차 남지 않았던 어느 날,

작은 방 책상에 앉아

먹구름 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무너져 내린 삶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가슴을 조여 왔습니다.


무엇을 해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 속에서

오래전 사 두고 읽지 않았던

한 권의 책을 무심코 꺼내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찾아내겠다는 기대조차 사그라든 채,

습관처럼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한 문장이 삶을 가르는 빛처럼 내면을 가로질러 들어왔습니다.

“근원적인 어리석음은 ‘나=생각’이라는 믿음이다.”


너무나 강렬했기에 머리는 뜻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다만 문장이 곧장 한 줄의 진동이 되어 울렸습니다.

“나는 생각이 아니다.”


그 순간,

세상이 정지한 듯 모든 것이 멈춰버렸습니다.

머릿속 어딘가에 붙어 있던 믿음이

마치 스위치를 내리듯 확 꺼져버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삶을 지탱해 온 서사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성공과 실패, 후회와 기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정의하던 모든 줄거리들이

영화가 끝난 뒤 스크린이 꺼지듯, 텅 비어버렸습니다.


그 자리엔 어떤 감정도, 어떤 해석도 붙지 않는
오직 ‘아무것도 없음’만이 남았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사라진, 마치 진공처럼 텅 빈 상태였습니다.

나를 규정하던 모든 재료가 사라진 그 없음의 순간에,
오직 하나의 사실이 존재 전체를 관통하며 드러났습니다.


살아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몸의 살아 ‘있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신체가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멈추자 비로소 드러난,
무게와 밀도를 지닌 ‘묵직한 덩어리감으로의 존재’였습니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관념이 아닌,
부정할 수 없는 실제로 내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동시에 알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 덩어리감과 함께 늘 있었지만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앎’이었습니다.


어디서 배워서 아는 지식의 앎이 아니라,

그 ‘덩어리감으로 느껴지고 있음’

스스로 아는 ‘앎’이었습니다.


있음’이라는 묵직한 덩어리감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을 아는 ‘앎’ 또한 동시에 깨어났습니다.

둘 사이엔 어떠한 틈도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몸이 드러난 그 자리에서
있음과 앎은 단 하나의 실제로 함께 켜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의 드라마가 꺼져버린 순간,

살아있다는 사실이 본연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책에서 마주한 문장은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우는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었습니다.


“있음 + 앎 = 살아있음.”


이것은 머리로 만들어낸 공식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멈춘 자리에 남은 그 묵직한 덩어리감(있음)과,

그것을 스스로 아는 앎이

하나로 맞물리며 터져 나온 존재의 직관이었습니다.

나는 비로소 “아, 내가 살아있구나” 하는

생생한 실감에 닿았습니다.

그곳엔 어떤 의문이나 의심도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혹시 이 체험이 아직은 관념처럼 들린다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지금, 몸에서부터 확인하면 됩니다.


이 공부의 출발은 언제나 몸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존재하며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몸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단서이자 출발점입니다.

몸이 없다면 삶이라는 게임은 시작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만히 자신의 몸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생각이 아니라,

몸 자체가 지닌 묵직한 덩어리감을 그냥 느껴보십시오.


그 순간 두 가지 진실이 동시에 발견됩니다.

하나는 존재하는 ‘몸으로 드러나 ‘있음’이요,

다른 하나는 몸으로 드러나 있음을 아는 ‘앎’입니다.

이것은 당신이라는 존재가 지금 이 순간

세상에 드러나 있다는 그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생생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몸으로 드러남’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통해 마주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드러난 모든 현상은

반드시 드러나지 않은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치기 위해 바다가 필요하고,

빛이 드러나기 위해 태양이라는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몸은 근원적 생명이 드러난 형상이며,

그 형상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사실로 먼저 확인됩니다.

‘앎’은 그 드러남과 함께 필연적으로 나타납니다.

살아있음의 여정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있음과 앎’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있음과 앎이라는 발견은

삶을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갈라놓았습니다.

어떤 개념도, 해석도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름 붙일 수 없지만,

묵직하면서도 생생한 덩어리감으로 느껴지는 ’ 있음’과,

“살아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알아지는 ‘앎’이었습니다.


앎은 단순히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지금 ‘살아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스스로를 되비추어 알아차리는 자각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 살아있음의 자각이야말로 앎이 지닌 본연의 성질이자.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입니다.


‘있음’과 ‘앎’을 덩어리감으로 만난 체험이

바로 오래도록 찾고 있던 대답의 시작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날의 감각은

조금씩 명료한 틀을 갖추었습니다.


명료함과 함께 나의 언어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개념의 껍질이 벗겨지고,

가장 근원적인 고백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습니다.


‘아~ 모든 것은 내가 살아있음으로 비롯되었구나.’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그 엄연한 사실이 있기에,

비로소 세상이라는 풍경도 내게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야말로,

지금 경험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지독한 고통도, 쉼 없이 명멸하던 생각들도

결국 살아있다는 생생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현상의 뿌리는 결국 단 하나,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이 체험을 말 그대로

‘살아있음’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살아있음’은 결코 관념적인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이 인식의 자리에는 분명히 드러난 실재가 있었습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이 묵직한 존재감을

체험의 언어로 ‘덩어리감’이라 불렀습니다.


무엇이라 규정할 수는 없으나

분명히 그곳에 ‘있음’ 자체로 묵직한 존재감,

그것은 생각이 내가 아님을 아는 순간,

과거의 드라마들이 통째로 날아간 자리에 드러난

‘텅 빔’의 밀도감이었습니다.


마치 몸속이 진공 상태가 된 듯 비어버렸으나,

역설적으로 비어 있음은 공기의 압력처럼

생생한 덩어리감으로 진동시켰습니다.

비어 있으나 살아있는 생명력의 밀도로 꽉 차 있는 묵직한 실감.

그것이 바로 스승들이 말해온

‘있음’이자 ‘현존’이며 ‘존재’, ‘내면의 몸’이었습니다.


하지만 덩어리감은 그 자체로 목적지가 아니라

본질로 들어가는 입구였습니다.


묵직한 존재감 그 자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포착하는 감각이

때로 선명해지거나 희미해질 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 속에서도,

이를 지켜보는 ‘앎’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있음’은 모든 것이 일어나는 고요한 바탕이었고,

‘앎’은 그 바탕과 그 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동시에 비추는 명료한 빛이었습니다.


‘덩어리감’은 제가 느낀 표현일 뿐입니다.

자각의 입구에서 마주하는 이 생생한 실재는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언어로 불리느냐가 아니라,

몸이라는 실체를 통해 '있음'을 실제로 느끼고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평생 붙들고 살아온 모든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었습니다.


살아있음의 본질을 이토록 선명히 마주하자,

그동안 종이 위에서만 부유하던 스승들의 말씀이

비로소 몸을 관통하는 생생한 실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가 이르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먼 하늘의 선언이 아니라,

지금 몸으로 느끼고 있는

살아있음 자체를 가리키는 지도처럼 읽혔습니다.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있음’과 ‘앎’을 통해,

몸이라는 실체 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 과정을 몸소 체험했을 때

비로소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나는’이 되었습니다.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모든 답이 들어 있음을

문장은 감각을 통해 일깨워주고 있었습니다.


붓다의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역시

고단한 수행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법(진리)처럼 다가왔고,

법은 깨어 있는 앎을 통해

지금 이 순간 몸으로 확인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스스로 비추어 알아차리라는 말씀이

비로소 ‘자등명 법등명’으로 들렸습니다.


그렇게 스승들의 가르침은 머릿속 개념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사실을 관통하며

생생한 언어로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스승들이 비추는 종착지는 결국 단 하나의 자리,

바로 살아있다는 사실의 자각이었습니다.


자각의 빛이 드리우자

삶의 엄정하고도 명료한 질서가 드러났습니다.

‘있음’은 몸을 대지 위에 직립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며,
‘앎’은 그 있음의 자리에서 오감을 통해

펼쳐진 세상과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분명함이었습니다.


이렇듯 순수한 ‘있음과 앎’이 역동적으로 솟구쳐서

몸을 살아 있게 하는 힘을

나는 ‘근원적 생명력’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있음과 앎은 근원적 생명이며,

생명이 몸으로 드러났을 때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살아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두어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곧 살아있음의 자각입니다.


나는 늘 살아있었지만,

이 사실이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해서 까마득히 잊고 살았습니다.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더 가지기 위해, 남보다 앞서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고통으로 여기기도 하며

"도대체 왜?"라는 공허한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심지어 생명의 유일한 통로인 몸을 술과 담배,

탐욕과 쾌락의 도구로 대해왔습니다.

이렇게 몸을 함부로 대했던 것은,

몸을 생존과 쾌락을 위한 도구나

고통의 껍데기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근원적 생명이 박동하는 이 소중한 몸을

생존의 긴장 속에서

고통이 스며드는 거친 현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어긋남은 ‘생각이 곧 나’라고 믿었던

어리석음에서 시작되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생각이라는 근원적 무지에 빠져

생각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스스로가 삶의 전부를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절박한 고립감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왜 이렇게 살아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던져보아도

돌아오는 답은 너무나 먼 막막함뿐이었기에,

결국 한구석에 덮어두고 지나쳐야 했습니다.

답은 손에 잡히지 않는데,

삶은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이 밀려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생각의 목소리가 더 커졌고,

목소리를 나라고 믿으며 끌림을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렇게 그 근원적 무지 속에서

가장 먼저 밀려나고 방치되어 고통받았던 것은,

다름 아닌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음의 자각 속에서 마주한 몸은

더 이상 단순한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탐험하고자 하는 근원적 생명이 빚어낸,

정교하게 살아있는 ‘아바타’ 그 자체였습니다.


내가 이 몸을 살리며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몸을 숨 쉬게 하고 움직이며

스스로 삶을 펼쳐내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살아내야만 한다고 믿었던 모든 수고로움 뒤에는,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몸을 살아있게 하는 근원적 생명이 있었습니다.


근원적 생명이 자신의 아바타인 몸으로 삶을 세웠으니,

몸을 살려내고 이끄는 것 역시

그 생명이 지닌 본연의 작동 방식인 것입니다.

몸을 세운 생명이 마땅히 삶을 스스로 살아가는 이치입니다.

그동안 아바타인 몸을 나라고 여기며 짊어졌던 생존의 무게는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무게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습니다.

“살아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에고가 삶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그때의 나에게는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쉼 없이 심장을 뛰게 하고,

베인 상처를 스스로 아물게 하며,

수조 개의 세포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조율하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에고가 통제하지 않아도

이미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는

이 '몸의 자동 시스템'이야말로 근원적 생명이 지닌

거대한 지혜의 증거입니다.


생명은 이미 스스로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몸과 생각을 나라고 여기는 에고는

내일의 생존을 위한 불필요한 걱정을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대신 몸의 덩어리감에서 전해오는

이 묵직하고 충만한 안정감 속에 머물며,

지금 이 순간과 온전히 하나 되어

기쁘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난 후, 뇌리를 스치는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근원적 생명은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놓친 적 없는 고요한 시선으로

훨씬 이전부터 나와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경이로운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기억해 낸 것입니다.


하늘이 나를 보던 날


20대 어느 날,

골목길에서 처음으로 ‘그 시선’을 마주했습니다.

길 한복판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두툼한 지갑 하나.

빽빽한 지폐를 본 순간, ‘가질까?’ 하는

유혹이 찰나의 생각으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지만,

마치 하늘이 내려다보고,

벽들이 바라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순간,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시선 앞에서

어떤 변명도, 타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갑을 경찰서에 맡기고 돌아섰지만

그날의 감각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삶의 갈림길마다

‘시선’은 문득 다시 찾아왔습니다.

욕망이 양심을 가릴 때면

하늘과 벽들이 지켜보던 그날의 감각이 살아나

멈춰 세우곤 했습니다.


비록 시선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날들이 더 많았지만,

한 번 마주한 시선은

삶의 밑바닥에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생각과 감정을 나라고 믿었기에

수많은 실수와 후회 속에서 헤매고 살았습니다.


그날의 시선은 외부에서 겨누는 시선이 아니었습니다.

살아 있는 근원적 생명, 곧 살아있음이

자신을 기억해 내라고 보내온 강렬한 깨어남의 신호였습니다.


골목길에서 지갑을 보며 욕망에 끌리던 ‘생각의 나’와,

욕망을 지켜보던 ‘침묵의 시선’이 동시에 존재했음을 이제는 압니다.

그 찰나의 마주침이 바로,

생각이 지배하던 긴 잠에서 깨어나는 첫 빛이었습니다.

살아있음의 신비는 그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