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PART 1. 살아있음. 3장.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

by 라이프퀘스트 한

3장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은 ‘살아있다’는 엄연한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가만히 멈춰 느껴보십시오.

애쓰지 않아도 숨은 저절로 쉬어지고 심장은 박동합니다.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보고 있다는 사실과,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

그리고 모든 것을 인식하며 알고 있는 ‘앎’.


이것이 바로 ‘살아있음’입니다.


생각이 우리를 살리는 것도 아니고,

몸이 스스로 살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과 몸은 근원적 생명이 드러난 작용과 형상일 뿐,

자체로는 한 순간도 자립할 수 없습니다.


이 묵직한 덩어리감은 하나의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몸으로 드러난 근원적 생명, 즉 ‘있음’

생명 스스로가 자신을 아는 ‘앎’

본래부터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태양과 빛의 관계와 같습니다.

태양은 존재하는 동시에 빛을 발합니다.

태양과 빛은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근원적 생명은 ‘있음’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아는 ‘앎’이기도 합니다.


지금 손을 한 번 들어 보세요.

‘들어야겠다’는 의도가 일어나고, 곧이어 손이 올라갑니다.

손을 움직인 것은 분명 몸이지만,

그 몸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컵의 서늘한 냉기, 귓가를 스치는 무심한 소음,

가슴에 머물다 가는 찰나의 감정들—

이 모든 현상을 ‘알아차리고 있는’ 그 주체는 대체 누구입니까?

우리가 물질이라 믿는 몸입니까, 전기 신호를 주고받는 뇌입니까,


아마 “그거 전부 다 나 아니야?”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숨 쉬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일이

몸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몸과 생각을 ‘나’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배가 고프면 ‘내가’ 고픈 것이고,

몸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이며,

몸이 사라지면 나라는 존재도 함께 사라진다는 생각.


하지만 그것은 생명의 실상을 보지 못한 채

우리가 오래도록 믿어온 오해일 뿐입니다.


밤에 깊이 잠든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심장은 쉼 없이 뛰고 폐는 스스로 공기를 채웁니다.

몸은 자기 질서 속에서 회복하며 균형을 찾아갑니다.


메마른 화분에 물을 주면

다시 잎이 살아나는 식물도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안에서는 어떤 힘이 쉼 없이 흐르며 생명을 지탱합니다.


이 본질이 바로 모든 생명체 속에 깃든 ‘근원적 생명’입니다.

근원적 생명은 단순한 동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몸을 살아 있게 하는 흐름이며,

동시에 스스로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앎이자,

그 생생한 존재를 알아차리는 ‘자각’으로 드러납니다.


몸을 가만히 느껴보십시오.

그 안에는 묵직한 실재감이 있습니다.

어떤 관념도, 어떤 해석도 붙지 않은

단순하지만 분명한 살아있는 느낌.


나는 이것을 '덩어리감'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특별한 수행을 통해 얻는 신비로운 감각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의 물질과 만날 때

몸이 정직하게 알아차리는 존재의 신호입니다.


예를 들어

손으로 무엇을 누르거나 밀 때 느껴지는 감각,

물건의 무게를 느낄 때의 압력,

강한 바람이 몸에 부딪힐 때의 밀림,

물속에서 느껴지는 저항감.

이 모든 감각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공통된 하나의 느낌,

바로 ‘덩어리감’으로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몸 안에도 묵직한 실재감이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잘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은 내 안에 살아 있는 존재의 농도입니다.

어떤 관념도, 어떤 해석도 붙지 않은

단순하지만 분명한 살아 있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돌을 만질 때 돌이 단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조금 다릅니다.

내 안의 덩어리감이 돌이라는 경계를 만나

자신의 단단함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누르는 압력도,

바람이 몸을 미는 힘도,

물속에서 느껴지는 저항도

가만히 살펴보면 서로 다른 감각이라기보다

내 안의 덩어리감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세상 만물을 만질 때

나타나는 거의 모든 촉감이

결국 이 덩어리감과 같은 감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만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순간 일어나는 일은 이것입니다.

살아있음이 세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재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이 묵직한 실재감은

단순히 개인적인 느낌에 그치지 않습니다.

흥미롭게도 현대 과학과 철학은

이 체험이 결코 환상이 아님을 증명하는

몇 가지 명백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현대 물리학에 따르면 원자를 수십억 배 확대하면

그 안의 99.99%는 비어 있는 공간입니다.

우리가 단단하다고 느끼는 돌이나 책상도

사실은 물질이 꽉 찬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들이 서로 밀어내며 만들어내는

'에너지 장(Field)의 반발력'입니다.


우리가 손바닥에서 느끼는 단단함은

물질이 가득 차서가 아니라,

그 안의 에너지가 서로 밀어내며 만들어내는

밀도 높은 저항의 감각입니다.

보이지 않는 힘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기에,
우리 몸은 그것을 묵직한 실재,

즉 ‘덩어리감’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나무와 돌, 책상과 우리 몸을 이루는 근본 입자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들이 얼마나 밀도 있게 뭉쳐 있고

어떤 빈도로 진동하느냐, 즉 ‘존재의 농도’가 다를 뿐입니다.


내가 산책길에 만난 나무, 돌, 자동차, 벽, 난간

그 무엇이든 가만히 손을 대고 느껴보면,

겉으로 드러난 온도와 질감만 다를 뿐

그 바탕은 예외 없이 ‘덩어리감’으로 수렴된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날카롭고 뾰족한 물체조차 지그시 누르고 있으면,

어느덧 그 예리함은 사라지고

몸의 덩어리감과 다를 바 없는 온전한 실제로 드러납니다.


내가 책상을 만질 때

사실은 책상도 나를 만지고 있습니다.


손끝의 압력은 나만의 것도, 책상만의 것도 아닌,

동일한 바탕을 가진 존재들이 만나

서로를 확인하는 공통의 사건입니다.


눈으로 보는 빛, 귀로 듣는 소리, 피부로 느끼는 촉감은

뇌 안에서 결국 ‘전기 신호’라는 단 하나의 언어로 번역됩니다.

해석이 붙기 전,

자각이 마주하는 실재는 놀라울 만큼 단순합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몸이 세계와 만나며 느끼는

‘순수한 신호의 뭉치’입니다.


결국 세상 만물과 몸이 만나는 그 접점에서,

하나의 근원적 생명이 저마다 다른 형상의 옷을 입고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과학이 말하는 ‘에너지 장의 저항’은

결국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이 묵직한 덩어리감과 맞닿아 있습니다.


불교의 언어를 조금 더 빌리면,

이 덩어리감의 자리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입니다.

생명 그 자체인 ‘있음’과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앎’의 자리가 바로 공(空)이며,

그 비어 있는 충만함 속에서 인연 따라

잠시 드러난 몸과 생각의 형상들이 바로 색(色)입니다.


이름은 저마다 다르지만,

과학의 언어와 불교의 지혜는 결국

지금 우리 몸에서 느껴지는 이 묵직한 덩어리감이라는

단 하나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보이는 형상과 그 바탕인 빈 충만함은

본래 이처럼 하나입니다.


‘공(空)’이라 하면 흔히

텅 빈 허공이나 없을 무(無)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단순한 공백이나 허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본래부터 정해진 제 성질이 없기에,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로 붙잡힐 수 없다는 깊은 통찰입니다.


비유하자면, 팽팽한 축구공 안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로 가득 차 있듯이,

그 고요한 자리에는 말로 규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밀도 있는 ‘있음’이 드러납니다.


비어 있으나 공허하지 않고, 붙잡을 수 없으나

또렷한 이 묵직한 덩어리감이 자각의 입구가 됩니다.


색은 바탕인 공(空)이 인연 따라 드러난 물질적 형상입니다.


축구공 안의 공기가 ‘공’이라면,

그 공기를 담아 둥근 모양을 이루게 하는 가죽은 ‘색’입니다.

가죽이 없다면 공기의 존재를 알 길이 없고,

공기가 없다면 가죽은 그저 쪼글쪼글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결국 공과 색은 하나의 생명 안에서 함께 드러납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드러남을 오온(五蘊)으로 설명합니다.

오온의 산스크리트어 원어인 ‘스칸다(Skandha)’는

한자로 번역되면서 ‘쌓여 있는 것’을 의미하는 ‘온(蘊)’이 되었지만,

그 본래 의미는 ‘무더기’, ‘집합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색), 느낌(수), 인식(상), 의지적 작용(행), 의식(식) —

이 다섯 무더기가 모여 ‘나’라고 부르는 경험의 총체를 이룹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 다섯 요소가 각각 흩어져 있는 무더기일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각의 순간, 색·수·상·행·식은

서로 분리된 것으로 경험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살아있는 흐름 속에서 동시에 드러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덩어리감'을 만납니다.

그것은 다섯 무더기가 한꺼번에 드러날 때

‘느껴지는 자각의 밀도’입니다.


이 '덩어리감'이야말로

오온이 응축되어 드러나는 존재의 감각입니다.

나는 이 감각을 자각으로 들어가는 가장 확실한 입구라고 봅니다.

동시에 우리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자각의 통로입니다.


이 덩어리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때로는 진하게,

때로는 조금 흐리게 느껴질 뿐입니다.


모든 촉감은 대상이 전달하는 정보라기보다

몸 안에 이미 존재하는 덩어리감이

세상과 만나는 순간 살아있음으로 드러나는 경험입니다.


“살아있음.”


이 압도적인 실재는 어떤 질문보다 앞섭니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살아 있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잠들어 있을 때도, 수면마취 중에도,

고통으로 무너져 내릴 때에도

생명은 단 한순간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생명은 늘 우리 곁을 지키는 공기처럼 한결같기에,

우리는 그 흐름을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몸의 묵직한 덩어리감 또한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너무도 익숙해진 탓에

‘근원적 생명’의 실재를 보지 못한 채

소란스러운 사건들만 뒤쫓아 달릴 뿐입니다.


이 덩어리감으로 느껴지는 ‘있음’은

태어나지도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넘어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공간을 넘어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크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비교를 넘어

나은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으며,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습니다.


판단을 넘어

옳지도 그르지도 않으며,

성공도 실패도 아닙니다.


감각을 넘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며,

거칠지도 매끄럽지도 않습니다.


온도를 넘어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타오르지도 얼어붙지도 않습니다.


상태를 넘어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으며,

가득 차 있지도 비어 있지도 않습니다.


인과를 넘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으며,

채울 것도 비울 것도 없습니다.


감정을 넘어

기쁘지도 화내지도 않으며,

좋아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이 위를 지나가고,

생각은 이 안에서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몸은 이 위에서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그러나 덩어리감으로 느껴지는 이 ‘있음’은

그 모든 변화가 일어나는 자리일 뿐,

변화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주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늙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는 것은 무엇입니까?

변하는 것은 형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있음’입니다.


존재의 묵직한 덩어리감을 자각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몸 내부에서 박동하는 진동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외부의 자극에 즉각 반응하는 거친 감각이 아닙니다.

소란함이 잦아든 자리에서 고요히 울리는 살아있음의 진동입니다.

가슴의 고요한 박동이나 호흡의 드나듦 속에 흐르는

생생한 진동이 이미

몸의 묵직한 존재감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들숨과 날숨,

숨결에 따라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가슴,

바닥을 딛고 있는 발바닥의 생생한 감촉.

온몸 전체에 퍼지는 울림,

그 감각을 알아차리는 순간,

삶은 비로소 새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오랜 전통은 '있음과 앎'을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러왔습니다.

도(道)나 존재(Being), 현존, 임재, 혹은 성령이라 불렀고,

깨달음이나 알아차림이라 말했습니다.

이것들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실재라면,

더군다나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반드시 지금 우리 몸에서 느낌으로라도 확인되어야 합니다.


현존(Presence), 임재(Presence/Advent)라는 말은

본래 ‘지금 여기에 와서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멀리 있는 신을 상상하는 관념이라기보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실제로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령(Holy Spirit)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말하듯,

성령은 먼 하늘 어딘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몸을 움직이게 하는

생명의 숨결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있음과 '현실에 실제로 있다'는 존재(Being) 역시

머릿속 생각이 아니라 이 생생한 실감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이 묵직한 존재감, 곧 생명력의 밀도가

바로 근원적 생명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무언가 ‘있다’고 말하려면

그것은 눈에 보이거나 분명히 느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것을 ‘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데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허한 관념이며 생각 속의 상상일 뿐입니다.


만약 이 실감이 없다면,

그 모든 고상한 이름들은 결국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몸에서 느껴지는 이 묵직한 생명의 ‘느낌’만이

존재를 확인하게 하는 유일한 실마리입니다.


나는 이 부정할 수 없는 실재의 느낌을 ‘덩어리감’이라 부릅니다.


덩어리감은 보이지 않지만,

단초는 언제나 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아프면 병원을 찾으면서도

정작 “살아있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또렷이 느끼며 사는 순간은 드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생명력이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를 살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그 자각이야말로

삶의 모든 순간을 떠받치는 변치 않는 생명의 동력입니다.


이 응축된 감각은 단순한 신체 감각이 아닙니다.
생각 이전에 이미 살아 있다는 사실이
몸에서 실감으로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나는 이 실감을 ‘살아있음의 자각’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살아있음의 자각이
모든 현상의 뿌리인 근원적 생명로 통하는 입구입니다.


근원적 생명이 몸을 살아 있게 하며,

몸을 통해 수많은 경험이 일어납니다.

그 경험 위에서 생각이 생겨나고,

생각은 기억이 되며,


다시 그 기억이 또 다른 생각을 낳습니다.


그러니 몸과 생각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살아 있게 하는 생명을 바탕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입니다.

이 신비로운 움직임을 나는 ‘살아있음’이라 부릅니다.


애쓰지 않아도 생명력은 알아서 제 길을 가고,

스스로 꽃을 피워내는 ‘저절로의 흐름’입니다.

생명은 태어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형태는 끊임없이 변하지만,

생명으로서의 ‘있음’과 ‘앎’은

모든 변화를 비추어 알아차리며,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에 변함없이 드러납니다.


본질은 결코 생명체라는 틀 안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별빛은 우리가 보든 보지 않든 여전히 빛나고,

생명 역시 자각하든 망각하든

온 우주에 빈틈없이 가득합니다.

근원적 생명은 형태의 유무를 넘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를 관통합니다.


우리는 생명과 분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의 흐름 안에서 매 순간 살아 있습니다.

몸과 생각을 ‘나’라고 여기지만,

실상은 생명이 몸이라는 형상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있을 뿐입니다.


손을 들어야겠다는 의지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을 느끼는 감각도,

모두 생명이 그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체험하는 과정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러나 변화의 한복판에는 변하지 않는 바탕이 있습니다.

편안함이든 불안이든, 공허함이든

모든 상태를 비추어 아는 ‘있음과 앎’은

단 한순간도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바탕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맨 진리입니다.


하지만 진리가 바탕으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일상에서 ‘확인’하며 사는 것은 전혀 별개입니다.


태양은 구름 뒤에서도 항상 빛나고 있지만,

보이는 구름만 보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근원을 자각하느냐 망각하느냐에 따라

경험하는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머리로 이해되는 개념이 아니라,

생명의 흐름을 통해 몸에서 직접 확인되는 실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들어왔던 그 수많은 이름들을

다시 정립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히 나누어 본다면 존재(Being)와 현존, 임재, 성령은

생명 그 자체인 ‘있음’을 가리키는 말에 가깝습니다.


또한 깨달음과 알아차림은

그것을 스스로 비추어 아는 ‘앎’의 측면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도(道)라는 말은

이 둘을 나누지 않은 채 하나로 가리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그 말들이 가리키는 자리는 결국 하나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몸에서 직접 체험되는

살아있음의 자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있음’만 말하고 ‘앎’을 놓치면
진리는 다시 막연한 관념이나 형이상학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반대로 ‘앎’만 강조하고 ‘있음’을 놓치면
자각은 몸을 잃은 채

관찰이나 심리적 기술로 축소될 수 있습니다.


실제의 체험에서는 둘이 따로 오지 않습니다.
살아 있다는 실감이 있기에 그것을 아는 앎이 있고,
그 앎이 깨어 있기에 살아있음은 비로소 자각됩니다.


그러므로 존재와 알아차림, 있음과 앎은

생각으로는 나누어 설명할 수 있어도
실재 안에서는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만 붙잡는 순간
우리는 다시 반쪽짜리 진실 안에 머물게 됩니다.

살아있음은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의 통합된 실재가
지금 이 순간 몸에서 묵직하게 확인되는
살아있음의 자각입니다.


살아있음의 자각은 단순한 지적 인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이

덩어리감이라는 자각의 통로를 통해

스스로가 실재함을 온전히 알아차리는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지금 이 순간 몸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그 생생한 있음과 앎이

살아있음을 지탱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나는 모든 표현을 아우르되,

몸으로 직접 체험되는 가장 구체적 언어로서

‘살아있음’이라 합니다.


이제 ‘살아있음’의 본질을 내면으로 가져와 묻겠습니다.

‘살아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바탕은 정말 실재하는가?’


이 물음은 관념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생생한 경험으로의 초대입니다.



존재의 거울 앞에 서 보십시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자신이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 모른 채 살아가다

끝내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근원을 망각한 채 성공과 관계를 좇으며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어도

‘참된 본질’과 멀어진 삶을 살게 될 뿐입니다.


살아있음을 자각할 때, 비로소 묻게 됩니다.

“나는 정말 진정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서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살아있음을 자각한다면

살아있음은 침묵 속에서 말할 것입니다.


“나는 늘 비추던 그 시선이다.

나는 곧 너다.

언제나 여기서 기다렸다.

마침내 나를 기억해 냈구나.


이 기억, 이 자각이 삶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지금,

방황은 힘을 잃고 길은 저절로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