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PART 1. 살아있음. 4장 자각에 대하여

by 라이프퀘스트 한

4장 자각에 대하여


자각은 삶의 풍랑을 없애는 기술이 아닙니다.

고통과 불안의 파도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도록

삶이라는 배에 중심추를 다는 일입니다.


이 중심추를 단다는 것은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살아있음의 바탕—곧 조건 없는 평온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표면 아래,

깊은 바닷속이 늘 고요하듯

삶의 소란함 아래에는

한 순간도 평온을 잃지 않은 바탕이 있습니다.


자각은 그 바탕으로 돌아가,

외부 상황과 상관없이

내면에 이미 갖춰어져 있는 평온을 누리게 합니다.

그 평온은 결핍이 나를 끌고 가지 못하게 하고,

어떤 순간에도 내면 깊은 곳의

충만함을 먼저 길어 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건 속을 걸어갑니다.

기분 좋은 일도 있지만 갑작스러운 난관에 부딪히거나

말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도 합니다.

삶은 늘 변하고,

소용돌이 속에서 생각 또한 맥없이 흔들립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늘 상황에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일이 잘되면 들뜨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에 휩싸입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덧 삶에 끌려다니는 듯한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같은 자리에서 고통을 반복할까요?


대부분의 고통은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붙잡아

‘나의 불안한 이야기’로 엮어내는 습관에서 되풀이됩니다.


우리는 환경을 바꾸고 원인을 제거하려 애쓰지만,

고통은 외부에서 침입한 불청객만이 아닙니다.

생각이 사건을 붙잡고 해석하고 되씹는 동안,

고통은 내 안에서 모양을 갖추어 자라납니다.


환경을 아무리 바꿔도,

생각에 사로잡힌 존재 상태가 그대로라면

고통은 다른 가면을 쓰고 다시 찾아옵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질 때,

찌르는 것은 그 말 자체가 아니라,

말을 붙잡아 비극으로 만드는 해석입니다.


결국 고통의 실체는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주의를 지금 이 순간의 실재,

곧 몸의 묵직한 덩어리감으로 돌리기만 해도

요동치던 생각의 폭풍은 기세가 꺾이기 시작합니다.


자각은 추상이 아니라 삶에서 바로 쓰이는 힘이며,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가장 현실적인 길입니다.


자각은 생각을 즉시 비추는 거울입니다.

"아, 지금 상처받았다는 이야기에 붙잡혀 있구나."


이 한 문장이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 가리키는 자각의 자리로 주의가 옮겨가는 것입니다.


생각 자체가 아니라,

생각에 대한 ‘반응’을 목격하는 순간,

생각은 더 이상 나를 끌고 가지 못합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선택할 수 있습니다.

흔들리는 파도 속에서도,

배를 뒤집지 않게 하는 중심추가

내면에서 천천히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자각은 어떤 특별한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정적인 명상이나 신비 체험, 황홀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지켜내는 힘

지극히 현실적이고 강력한 내면의 근력입니다.


특히 자각이 선명하게 드러나야 하는 곳이 관계입니다.

우리는 대개 관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반응합니다.


비난에는 비난으로, 무시에는 분노로,

상처에는 방어로 응수하며 아픔을 더합니다.


그러나 자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무의식적인 반응과 의식적인 선택 사이에

짧지만 고요한 ‘여백’이 생깁니다.

여백은 단순한 멈춤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생생히 고동치는 ‘살아있다는 자각’입니다.


그 여백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지금 지키고 싶은 것은 자존심인가, 아니면 관계인가?”


이 물음이 마주하는 순간, 자각의 시선은 달라집니다.

외모나 나이 같은 겉모습을 넘어,

나와 다르지 않은 근원적 생명이 먼저 보이기 시작합니다.

상대의 주장에도 내 주장만큼의 이유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

마침내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은 상대를 바꾸려는 시도가 아니라,

자각의 거울이 투명해지는 과정입니다.

판단과 고집이 잦아든 고요 속에서,

습관적인 방어 대신 창조적인 포용을 시작합니다.


상대를 바꾸려 애쓰지 않아도,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관계의 풍경은 저절로 온기를 되찾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깊은 확인이 찾아옵니다.

근원적 생명이 상대 안에서도

똑같이 맥동하고 있음을 볼 때,

세상은 차갑고 낯선 타자가 아니라

같은 근원에서 솟아나는 하나의 흐름으로 드러납니다.


그때의 사랑은 흔들리는 감정이 아니라,

분리의 착각이 옅어질 때 드러나는 하나 됨의 실감입니다.

자각 속에 머물다 보면

온 세상이 거대한 사랑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변화는 관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삶의 중심이 ‘나’라는 이야기에서

‘살아있음’이라는 실제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은 타인의 시선과 외부의 기준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누가 더 성공했는지, 얼마나 인정받는지,

무엇을 소유했는지에 따라 스스로의 가치를 재단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각은 우리를 멈춰 세우고 질문하게 합니다.

“진정한 나로 살아 있는가?”


질문은 더 깊은 근원을 향합니다.

“지금, 살아있음으로 깨어 있는가?”


이 질문은 인생의 항로를 바꿉니다.

‘잘 사는 법’의 기준 자체가 달라집니다.

자각이 있는 삶은

외부의 성공 공식을 맹목적으로 좇기보다,

존재의 본질을 잊지 않는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자각은 결코 세상으로부터의 도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한가운데서 근원을 잃지 않는 당당한 복귀입니다.


살아있음을 자각할 때 느껴지는

묵직한 덩어리감에 주의를 머무르게 하십시오

그 연결 속에서 일하고, 사랑하고, 결정할 때,

모든 행위는 애씀 없는 ‘저절로’의 흐름을 타게 되며,

비로소 고통에서 멀어진 ‘살아 있는 선택’이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이라는 그림자에 붙잡혀,

살아있음이 묵직하게 맥동하는 ‘지금’을 놓친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 지금 생각에 빠져 있구나.”

이 한 번의 자각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지금 여기로 돌아옵니다.


그 자각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자유입니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힘은 여기서 나옵니다.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불안을 고요히 지켜볼 수 있는 살아있음의 자각이

내면에 단단히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본질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자각이 깊어질수록 삶이 압도적으로 진해진다는 것입니다.

감각은 선명해지고, 생각의 소란은 잦아듭니다.

음식의 맛, 타인의 온기,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감촉이

단순한 물리적 자극을 넘어

“아, 살아있구나!” 하는 전율로 다가옵니다.


무엇보다 밥맛이 달라집니다.

자각을 통해 내가 무엇인지 알아갈수록

내면에서 감사함과 평온함이 저절로 차오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감사함’이라는 반찬을

매 숟가락마다 얹어 먹는 것처럼,

자각 이후로 밥맛이 없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감사함이 저절로 올라와

매 끼니가 살아있음을 다시 만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날씨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분별도 옅어집니다.

쏟아지는 햇빛은 축복으로,

내리는 비는 대지를 살리는 생명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제 자각의 시선은 세상 만물로 확장됩니다.

길가에 핀 작은 풀꽃 하나,

무심히 놓인 돌멩이 하나에서도

근원의 신비가 똑같이 맥동하고 있음을 봅니다.

온 우주가 나와 함께 한 덩어리로 숨 쉬고 있다는

이 경이로운 실감 앞에서,

존재를 향한 감탄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삶이 바뀐 게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리가 바뀐 것입니다.

풍랑은 계속되지만 배의 중심추가 세워지고

반응과 선택 사이의 여백이 열릴 때

우리는 더 이상 사건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각이 필요합니다.

자각은 삶의 문제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문제를 겪는 자리를 바꾸는 힘입니다.

또한 자각은 세상을 바꾸는 투쟁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감각하는 혁신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오래전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지식이나 정보를 새로 배우라는 명령이 아니라,

밖으로 흩어진 시선을 거두어

우리 본연의 자리를 돌아보라는 엄중한 초대였습니다.


붓다는 “분별이 고통을 만든다”라고 했고,

예수는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스승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썼지만,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우리 내면에 이미 빛이 있으며,

빛을 자각하는 순간 세상은 새로워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각은 특별한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살아있음이 스스로를 비추는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입니다.

생각이 잠잠해지고 가슴이 열리며 숨이 고요해지는 찰나,

우리는 이미 그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합니다.

이 묵직한 확인은 찰나의 감각에 머물지 않고,

거친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붙들어줄 단단한 지탱점이 됩니다.



그 바탕이 바로 살아있다는 사실이며,

살아있음을 마주하는 일, 즉 ‘자각’입니다.


바람은 여전히 불어오겠지만,

자각이 열어 준 여백에서 우리는 다시 중심으로 돌아옵니다.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존재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더라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살아있는 이 순간으로.